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9 신묘년조 결락자의 `東`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9 신묘년조 결락자의 `東`
  • 경남매일
  • 승인 2023.08.2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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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광개토태왕은 서기 400년 전후에 실재했던 인물이었으며, 생전에 고구려를 대제국으로 만든 동아시아의 패자(霸者)였다. 그는 한민족 역사 전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역대급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용담은 세월 속에 묻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런데, 그의 사후 1500여 년이 다 되어가던 1880년 즈음 그의 훈적이 기록된 6m 40㎝의 거대한 비석이 세상에 위용을 드러내었다. 비의 거대한 모습에 압도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때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흐름 속에 대동아 공영이라는 제국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일본몽(日本夢)을 꾸었고 이 능비를 악용하고자 했다.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학술기관도 아니면서 초학문적인 권위로 조선의 역사에 개입하려 했다. 그들은 밀정 사카와를 통해 능비의 탁본을 입수했고 5년간의 비밀연구로 능비를 변조해 세상에 첫 해석을 내놓았다. 특히, 소위 신묘년조로 불리는 영락 5년 을미년 기사에는 "왜가 ~ 백잔□□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황당한 내용도 들어 있어 당대 지식인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후 여러명의 학자들이 신묘년조의 진실과 백잔 뒤에 결락 된 두 글자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초 능비에 관해선 중국 최고의 권위자라는 왕건군이 탁본업자 초붕도(初鵬度)가 조카딸에게 전해줬다는 능비의 필사본을 세상에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왕건군은 집안 현지에 가서 능비와 관련한 인물들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초붕도의 조카딸을 만났고, 그녀의 집 다락방에서 먼지에 덮여 있는 필사본을 발견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필사본 신묘년조에서 결락된 두 글자 가운데 앞 글자가 `동녘 東`으로 선명하게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왕건군의 주장에 의하면 이 필사본을 소유한 초붕도의 조카딸은 삼촌이 죽기 전 "중요한 것이니 잘 보관하라" 말하며 이것을 맡겼다 한다. 필사본은 능비에 붙은 이끼를 제거해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했던 초붕도가 소똥과 말똥을 발라 태우기 전 직접 필사한 것이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끼가 덮인 비문을 필사했다는데 과연 정확한 필사가 가능했을까? 하는 것과 오류의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앞 결락자를 `東`으로 확정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북한학자 손영종은 결락 부분을 동□신라(東□新羅)로 재구했다. 그는 신묘년조를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浿破百殘 東□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옛적에는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오던 것인데 (백제의 책동으로)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왕은) 패수를 건녀가서 백잔을 치고 동쪽으로 신라를 (초유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한 지문이 필요할 뿐 아니라 왜가 침입해 왔는데 고구려는 침입자 왜를 놔두고 책동자 백제와 까닭 없이 신라까지 침공한다는 모순이 있다. 이처럼 도패파(渡浿破)나 일제가 공개한 최초의 석문(釋文) 도해파(渡海破)의 바탕 위에 `東`을 넣고 온갖 방식으로 해석해도 문맥이 맞지 않는다.

또 백제가 인접한 신라를 치러 가는데 굳이 `東`이란 방향을 쓸 이유가 없다. 영락 14년, 왜와 백제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침공할 때도 `北`이란 방향을 쓰지 않는데, 신라만 지칭하여 `東`으로 쓸 까닭이 없다. 또 초붕도의 필사본에 있는 글자들은 발견자인 왕건군의 석문(釋文)이나 초기의 탁본인 사카와의 쌍구가묵본과도 여러 곳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왕건군은 자신의 석문에서조차 `東`을 넣지 않고, 결실자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이유는 초붕도의 필사본이 보이는 여러 곳의 오류를 고려할 때, 그는 결락자를 동(東)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석문에는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탁본에는 `東`이 없다. 오직 필사본에만 남아 있다는 것도 공인받기는 어려운 점이다. 또 결락 된 두 글자 중 앞 글자인 `東`이 초붕도가 필사했을 때만 뚜렷했다가 이후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글자 멸실의 과정이 어느 탁본에도 없기 때문이다. 비문을 태울 때 훼손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유독 `東`자만 그랬다는 점도 납득이 안 된다. 초붕도의 필사본은 탁본이 아니고 말 그대로 필사본이다. 이끼에 덮인 거칠은 비문을 필사했다는 것과 무엇보다 문맥이 맞지 않으므로 결락자 `東`은 신뢰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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