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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8 비문의 동일한 서사 구조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8 비문의 동일한 서사 구조
  • 경남매일
  • 승인 2023.08.0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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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과거 일제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옮기고 점제현신사비를 조작하는 등 우리의 역사를 훼손시켜 왔다. 황국사관에 입각해 모든 악은 정당화되었고 해방 후에는 <실증사학>이란 이름으로 우리 역사학계를 어지럽혔다. 실증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증명한다`는 좋은 뜻의 용어이나 그 속내는 우리의 역사를 없애거나 조작한 후에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으로 악용됐다. 겉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 같지만 실지에 있어선 우리 역사를 왜곡, 축소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류 사학계는 아직도 그 방법론을 계승한 단군신화설이나 임나가야설 그리고 가야불교 부정론을 부르짖고 있다.

원래의 신묘년조 기사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은 백잔(백제)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았다"가 아니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는 의도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게 더욱 자연스럽다. 다른 문헌에서도 결코 백제와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백제와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하다가 고구려에게 완전히 패배하였다는 기록밖에 없다. 이러한 명백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를 주장한 일제의 말처럼 그 기간을 서기 369년에서 562년까지라고 인정해 준다고 하자. 그렇다면 신묘년인 서기 391년의 백제ㆍ신라ㆍ가야는 벌써 왜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미 정복된 나라가 어떻게 다시 정복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어지는 영락 6년의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이란 기사를 보면 다른 정벌 기사에 없고 오직 영락 6년 기사 앞에만 `以`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때문에`라는 뜻으로 영락 5년의 원인 때문에 영락 6년 대왕께서 몸소 출정한다는 경위를 말하고 있다. 다른 조의 기사에서는 일어난 사건이 하나로 일단락되지만 유독 영락 5년과 6년은 `때문에`라는 뜻의 以가 있음으로 해서 실제로는 을미년과 병신년이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문단으로 봐야 한다.

한편, 위의 을미년의 신묘년조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오래전부터 속민 또는 촉민이 되어 조공을 해왔지만 왜는 4년 전, 태왕 자신의 즉위한 신묘년이 되어서야 늦게 조공을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렴치한 두 나라(二破) 백제와 왜가 허락 없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신라를 침공했으므로 다음 해인 영락 6년 병신년에 대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가서 신라 침공의 주적인 백제와 그에 조력한 왜를 토벌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토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사가 등장하며 고구려가 끝내 승리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능비 전체에서 하나의 사건을 기록할 때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가 타국을 침공할 때는 먼저 명분을 분명히 말한 다음 침공을 하고 승리한다. 이후 승리에 대한 과정과 전리품의 규모에 대해 언급하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묘년조도 동일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 단락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속민으로 전부터 조공을 오던 나라였다. 그런데 왜는 좀 늦게 영락 1년 신묘년이 되어서야 조공을 왔다. 둘째 단락에서는 그런데 영락 5년 을미년, 나에게 조공이나 오던 백제와 왜가 연합해 나의 허락 없이 속민인 신라를 공격했다. 셋째 단락은 그래서 영락 6년 병신년,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인솔하고 출정하시어 왜를 토벌하고, 완강히 저항하던 백제를 이긴 후 백제왕으로부터 완전한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태왕은 그들이 처음에 잘못한 허물을 널리 용서하시고"라며 태왕의 덕을 칭송하는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신묘년조의 변조와 결실자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백제와 왜가 고구려에 의해 토벌되었다`는 결과로부터 원인을 역추적할 필요가 있다. 즉, 셋째 단락의 내용인 `태왕이 몸소 왜와 백제를 토벌했다`는 결과가 둘째 단락에서 말하는 `백제와 왜가 신라를 침공했기 때문`이라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백제와 왜의 신라 침공`이라는 두 번째 단락의 결과는 첫 단락 `고구려에게 조공을 오던 세 나라` 가운데 두 나라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침공의 원인이 되었다는 식이다.

위의 세 단락을 보면 기존의 해석들은 숨겨진 주어와 목적어를 찾아내야 하거나 설명을 위한 과도한 지문과 추측이 있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새로 재구(再構)된 글자 `二`와 `倭侵` 그리고 `倭`를 넣어 해석하면 문맥은 자연스럽고 여타의 지문이나 추측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비문이 복잡한 성격의 문장이 아니라 선왕의 업적을 기록한 전기적 성격의 훈적비였으며 사실적이고 담박한 글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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