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6 속민과 신민의 의미와 차이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16 속민과 신민의 의미와 차이
  • 경남매일
  • 승인 2023.07.2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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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사람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특정사안을 선점해 상대를 프레임 속에 가두는 것이다. 또 핵심 주제를 벗어나게 유도하거나 작은 부분을 침소봉대하여 본질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해 진실을 덮는 것이다.

일제는 신묘년조의 `渡海破`와 경자년조의 `任那加羅`를 통해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들은 5년간의 비밀 연구 끝에 신묘년조에서 `두 二`를 `바다 海`로 변조해 고구려에 조공 온 왜를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왜로 둔갑시켰다. 변조로 해석은 왜곡되었고 문제는 있어 보였지만 최초의 해석이란 프리미엄 때문에 일제의 해석이 한동안 고착화 되었다. 석문(釋文)을 선제적으로 발표해 해석의 주도권을 잡아 버렸던 것이다. 사실 능비는 중국에 의해 이미 발견되었으므로 억지로 숨길 수도 없었다. 결국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면 조선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넣은 권위를 이용해 능비를 변조시켜 자국에 유리하도록 해석하기로 아예 작정했던 것이다.

일제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왜가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자기네들 해석을 외부에서 문제 삼더라도 변조한 비문을 근거로 억지로 우기면 되었다. 왜냐면 증거는 이미 사라졌고 후발 해석자들은 기존 해석으로 인한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로 인해 태왕의 위대한 업적은 계속 가려지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 역사학계는 능비 연구로 역사적 가치를 도출하고 태왕의 찬란한 업적을 선양해 활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아직도 많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신묘년조의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을 풀면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 되어 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는 신묘년부터 늦게서야 바다를 건너 조공을 왔다./ 그런데 두 파렴치한 나라 백제와 왜는 고구려 몰래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때문에 영락 6년 병신년,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제를 토벌했다"라는 내용이다.

첫 단락은 왜와 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한 전제로서 전치문(前置文)의 성격을 띠며 "이들은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고 조공을 바쳤다"라는 조공에 관한 내용이다. 그래서 `來`는 (조공을) 왔다는 뜻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은, 그런데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주제 정도인 백제와 왜가 고구려 몰래 자신의 속민인 신라를 침공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어 출병했다는 명분을 말한다. 즉 신묘년조의 원문 첫 단락은 조공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단락은 백제와 왜의 신라 침공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 단락은 고구려가 백제와 왜를 토벌했다는 것으로 변조되기 전 원래의 문장은 이처럼 단순 명료하였다.

■<속민과 신민> 위 신묘년 기사에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이란 글자가 나온다. 속민과 신민은 원래 같은 뜻을 가졌는데 동어반복을 피하는 한자의 특성상 다르게 표현한 용어일 수 있다. 아니면 주종(主從)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고구려인 주의 입장에서 종인 다른 나라들을 차별해 표현한 용어일 수도 있다. 원래부터 속민과 신민의 뜻이 달랐다고 보며, 당대의 대국 고구려라는 자국 입장에서 상대를 낮추는 표현으로 속민 또는 신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 비문을 쓴 고구려에서 보면 백제와 왜 그리고 신라는 자기들한테 조공을 오는 한 단계 아래의 약소국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큰형님이라면 백제ㆍ왜ㆍ신라는 손 아래 동생뻘이다. 그런데 큰 형님의 눈을 피해 둘째, 셋째가 막내를 공격했기 때문에, 백제와 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파렴치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백제와 왜의 신라 침공은 한 단계 아래 동생들의 싸움이었으므로 속민이나 신민이란 용어를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큰 나라의 지배를 받든 그보다 작은 나라의 지배를 받든 예속되는 점은 동일하다. 결국 속민과 신민의 의미는 비슷하나 고구려가 바라보는 입지에 따라 다르게 선택된 용어로 보여진다.

물론 이와 같이, 역사를 규명하기 위해선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도 중요하다. 하지만 신묘년조를 바라볼 때는 일제의 불손한 의도에 의해 비문이 이미 변조됐다는 사실을 모르고는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지금도 우리 역사학계는 <단군은 신화>, <한사군은 한반도>, <임나는 가야>라는 과거 일제가 짜놓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선 이미 세뇌된 역사학계가 깨어나기보다 국민이 깨어나는 `시민 역사학`의 시대만이 유일한 희망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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