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방의 역사서 <전라도천년사>와 <김해시사>를 둘러싸고 강단 사학계와 민족사학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강단 사학계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와 기문, 다라 등 여타의 지명을 한반도에 고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전라도나 경상도가 고대 야마토 왜가 점유한 임나가 아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 이것이 사실인 양 이들 역사서에 끼워 넣어 문제가 되고 있다.
신묘년조 기사의 진실도 "왜가 백잔□□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게 아니었다. 진실은 태왕이 병신년에 백잔과 왜를 토벌한 것은, 그 앞 해인 을미년에 백잔과 왜의 신라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을미년에 나오는 신묘년 기사의 원문 첫 단락의 뜻은 "백잔과 신라는 우리 고구려에게 이전부터 조공을 해 왔는데 왜는 신묘년이 되어서야 늦게 조공 온 한 수 아래 나라"라는 것이다. 또한 병신년 태왕이 직접 백잔과 왜를 토벌한 것은 백잔과 왜가 우리 모르게 파렴치한처럼 신라를 침공했기 때문이며, 이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사안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신묘년조의 온전한 해석을 위해서는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에서 끊지 말고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봐야 한다.
또, 왕건군의 능비 석문(釋文)에 의하면 1면 9행 39~41열에서 10행 1열은 군지과남(軍至窠南)으로 되어있다. 이때 과(窠)는 `보금자리, 소굴`의 의미가 있고 류승국 교수는 `窠南`을 `과구(窠臼)`로 보아 `왜구의 소굴`로 해석한다.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면 태왕은 왜의 소굴인 일팔성(壹八城)을 치고, 백제 수도 주변의 여러 성을 공략한 다음 아리수(한강)를 건너 위례성을 공격해 아신왕의 항복까지 받아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제는 능비 여러 곳에 손을 댔지만 변조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상황 따라 변조를 달리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특히 변조된 핵심글자 `海`는 획을 더하여 변조했고 `倭`는 음각된 글자에 접착물을 메워 `伐`로 교묘하게 변조했다. 또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참모본부는 변조 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과 중국의 반응을 살피며 `변조된 능비`를 관리해 오고 있었던 것 같다.이러한 일제의 치밀한 전략으로, 한국이 능비의 왜가 나오는 부분이 변조됐다고 주장하면 일본의 다께다 유끼오(武田辛男) 교수 같은 이는 "일본이 능비를 변조했다면 왜에 대한 불리한 기사를 아예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 역시 중요 부분의 변조를 위해 덜 중요한 부분은 남겨 두었던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유리한 핵심 부분인 신묘년조의 변조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두 二`를 `바다 海`로 변조한 이유>일제는 `두 二`자처럼 획이 적은 글자를 선택해 변조하기로 한다. 왜냐면 단순한 글자는 가획(加劃)으로 변조시킬 수 있지만 `渡`나 `破`의 경우 획수가 많아 가획을 할 수 없었기에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자들은 변조하지 않아도 일제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할 수 있었기에 渡, 破 두 글자는 그대로 살렸다. 그들은 비문의 조작을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글자를 대입해 보았고 결국 선택된 재료는 `두 二` 였다. 사실 비의 원문은 태왕의 공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었으므로 복잡한 문장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의 교묘한 변조에 의해 복잡하게 꼬여져 버린 것이다. 원문은 간단 명료했지만 변조 후 거짓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다보니 문맥도 맞지 않고 문장이 복잡해졌다. 결국 일제는 `두 二`를 `바다 海`로 바꾸었고 최소 변조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비문에서 원문을 찾아내는 핵심은 올바른 끊어 읽기와 문맥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탁본을 근거로 변조의 증거를 규명하는 데 있다. 한자는 끊어 읽기가 매우 중요한데 잘못 끊어 읽으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는 문장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는 식으로 된다. 일제가 원래의 `二`자를 `海`자로 변조시킨 관계로 끊어 읽기도 달라져 문맥은 꼬여 버렸지만 그래도 진실은 끝내 숨길 순 없었다.
역사는 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등소평이 말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도 전공이나 경력만이 전부가 아니다. 역사를 대하는 진정성과 중단없는 탐구의 자세를 갖추면 누구나 자격은 이미 충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