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⑭ 결락자 倭侵과 병신년조의 倭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⑭ 결락자 倭侵과 병신년조의 倭
  • 경남매일
  • 승인 2023.07.1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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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도명스님

어떤 분야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에는 세심한 관찰력과 전체를 이해하는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이처럼, 능비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볼 수 있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신묘년 기사도 辛卯年來度海破가 아니라 辛卯年來度까지 끊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海破`는 원래 `二破`였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습관적으로 문장을 來度, 二破처럼 대개 둘이나 넷, 여섯 등 짝수로 끊어 읽었다. 

세상에서는 신묘년 기사라면 으레 渡海破를 습관적으로 말해왔다. 그래서 以辛卯年來渡海破가 고정관념처럼 자리 잡아 以辛卯年來渡라고 끊으면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꾸 읽다 보면 이렇게 읽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면 이렇게 돼야 문맥이 맞는 본래의 비문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비문을 세상에 공개하기 전 `두 二`를 `바다 海`로 변조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라도 오래되면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하게 되고 당연한 듯 착각을 일으킨다.

원래 신묘년 기사는 세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문단은 서론으로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의 조공에 대한 내용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까지로, 의역하면 "백잔ㆍ신라ㆍ왜는 과거 우리 고구려에게 조공왔던 한 수 아래 나라들이었다" 두 번째 문단은 본론으로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으로 끊어진다. "그런데 두 파렴치한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셋째 문단은 결론으로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때문에 영락 6년 병신년 대왕께서 (신라를 구하기 위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잔국(백제)을 토벌했다" 이처럼 신묘년 기사는 문단마다 고구려, 백제, 왜, 신라가 함께 등장한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신라를 구하기 위해 백제와 왜를 토벌하는 명분과 과정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 <결락자. 倭侵>신묘년 기사 百殘 뒤의 결락자 □□ 부분은 `倭侵`이다. 해석하면 두 파렴치인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공하였다`는 내용이다. 결락자가 `倭侵`인 이유는 뒷 문장인 결과 "때문에 영락 6년 병신년 대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잔국을 토벌했다"는 것에 대한 원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입장에서 신묘년 기사는 임나일본부를 주장할 중요한 근거였다. 그래서 그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二破`를 `海破`로 변조했다. 또한 왜가 백잔과 신라를 파하는 주어가 되려면 百殘倭侵에서 백잔 뒤에 있었던 `倭侵`은 지워져야만 했다. 왜냐면 백잔 뒤에 `倭`가 남아 있으면 而倭 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倭侵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 왜를 격파하고"처럼 주어인 왜가 목적어인 왜를 치는 꼴이 되어 문맥이 안 맞기 때문이다. 

한편, 병신년 기사의 討伐殘國은 討[倭]殘國으로 바뀐다. 기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利`나 `伐`로 해석했으나 류승국 박사는 `倭`라고 주장했다. 저윤타이와 구로다 탁본을 보면 아래의 그림에서 복원되는 것처럼 `倭`가 분명하다. 이어지는 영락 6년의 기사에서 고구려가 징벌하는 대상인 `두 파렴치`한 놈들은 백잔과 왜이기 때문에 토벌된 대상도 백잔과 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倭`를 `伐`로 대입하면 討伐殘國 즉, 殘國(백제)만 토벌한다고 한정된다. 왜와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으니 토벌의 대상에도 반드시 왜가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倭가 그 자리에 있게 되면 태왕이 토벌한 두 파렴치 왜와 백잔이 드러난다. 이는 뒤의 결과를 바탕으로 앞의 원인과 연결시킬 개연성 때문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倭`를 `伐`로 변조했다. 그래서 이들은 원래 있었던 倭자의 `사람 人변`은 놔두고 `벼 禾`와 `계집 女`를 변조했으며 석회보다 더 강력한 종류의 접착물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저윤타이 탁본에서 나타난 것처럼 시간이 흘러 이전에 메워 놓았던 석회의 일부가 떨어져 원래의 획이 나오기도 했지만 `계집 女`의 가로획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변조를 위해 사용한 강력한 접착물로 인해 일부는 아예 능비와 하나가 되어버렸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일제에게 倭의 변조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討倭殘國 뒤의 `軍至窠臼 攻取壹八城` "군이 (왜구의) 소굴에 이르러 일팔성을 친다"는 내용과 연결되기에 그 흐름을 끊기 위해 倭를 다른 글자로 변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흔적은 숨길 수 없었다. 

<伐로 보이지만 복원 하면 倭 자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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