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진실은 단순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 사카와가 일본육군 참모본부로 가져간 쌍구가묵본의 신묘년조 기사는 단순하지 않고 엉겨있으며 이로 인해 변조됐다는 의심을 벗어날 수 없다.
요코이가 비를 최초로 해석한 1889년 이후 134년을 지나는 동안 한ㆍ중ㆍ일의 많은 학자들이 신묘년조의 엉긴 실타래를 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만한 해석이 아직 나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존 대다수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듯해도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의적인 의도가 아닌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선의의 연구자는 결과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한 선학(先學)의 연구가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덕분에 후학(後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능비를 해석한 주요 선행 연구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①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왜 침입설(渡海破):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는 백제, 신라를 파한 주체가 왜라고 해석하며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신묘년 당시의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문맥도 전혀 맞지 않는다. 또한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以爲臣民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잘못 해석했다.
② 정인보-고구려 주어설(聯侵):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聯侵新羅 以爲臣民 "백잔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문제는 신묘년 한 해 동안 고구려에게 패한 왜가 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테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는 식으로 앞뒤의 논리가 없다. 이때가 을미년인데 을미년이 아닌 신묘년의 전쟁을 기술했다는 것도 편년체로 씌어진 능비의 성격과는 맞지 않다. 또 주어와 목적어를 한꺼번에 생략했다는 해석도 부담이다. 그러나 북한의 박시형ㆍ김석형은 고구려를 주어로 하는 위당 선생의 설을 따른다. 박시형은 결실자를 招倭侵 또는 聯侵新으로 복원했지만 해석에 무리가 있다.
③ 이진희-석회도부설(石灰塗付說):일본육군 참모본부가 스파이를 보내 능비에 석회를 도포하고 변조했기 때문에 변조 이후 나온 모든 탁본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그는 석회탁본만 연구했는데 이후 원석탁본이 나옴에 따라 16~25자가 변조됐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한 왕젠췬이 현지답사를 통해 "석회는 발라졌지만 변조를 위한 의도적인 조작은 없었다"고 발표해 그의 주장은 지지기반이 약해졌다. 그러나 `금석문은 조작을 못 한다`는 철칙을 깨며 능비연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소중한 전기를 마련했다.
④ 왕젠췬(王建君)-조공설: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과거 우리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조공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신묘년부터 왜구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쳐서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그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우리 고구려에 대해 신하임을 자칭하며 줄곧 해오던 조공을 하지 않았다) 영락대왕 6년 병신년에 호태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침공한 가해자 왜가 아닌 피해자 백제를 친다는 모순이 있다. 또한 과도한 지문(地文)과 근거없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는 渡海破 부분도 변조는 없었다고 보았다.
왕젠췬은 1983년 그의 저서 『호태왕비 연구』에서 이진희의 석회도부설을 부정했다. 탁본업자인 초씨 부자가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석회도포는 했지만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은 참모본부가 사전에 비를 변조했고 관제사학자 요코이를 통해 최초의 해석을 세상에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渡海破 부분의 변조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답이 없는 해석을 붙들고 끝없는 미로를 헤매게 되었다. 일제가 애초에 노린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