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문자 이전에 소통하던 방식은 그림과 문양(文樣)이었다. 일반적인 흐름은 그림이 간소해져 문양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여러 가지 의미를 표현하는 상징이 되었다.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문양의 사용이 활발했을 때에는 가문에서 문양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며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들이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국기인데 최근 일본 자위대 호위함이 욱일기를 달고 부산에 입항해 문제가 됐다. 욱일기는 과거 기울어진 卍자 모양의 독일의 휘장 하켄크로이츠와 함께 침략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한국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저 깃발 아래에서 엄청난 고통은 당했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긴다면 굳이 친구가 싫어할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1884년 일본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카와 중위는 비문의 탁본을 참모본부에 가지고 갔고 그들은 환호했다. 왜냐하면 능비의 경자년 기사에는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임나의 흔적인 `임나가라`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5년 후에야 탁본과 해석을 세상에 공개한다.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비를 활용해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기로 결정했고,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후 조선을 무력침공한다는 `정한론`을 본격화했다. 대륙 침략의 본거지였던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82년 <임나고고>와 <임나명고>를 발간해 임나와 가야를 동일시하였고, 조선 침략의 명분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때마침 임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광개토태왕릉비를 발견한 사카와는 탁본을 구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즉시 학자들을 시켜 자국에 유리한 내용을 능비에 추가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연구를 진행했다. 사실 탁본의 조작 정도라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완전범죄가 되려면 결국 돌에 새겨진 원문까지 변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먼저 뛰어난 문헌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들에게 아주 불리한 부분은 문장 전체를 삭제하기로 했고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될 만한 부분은 찾아서 부분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왜에 대한 불리한 기사가 있는 2면 좌측 상단 그리고 3면 1행과 우측 하단이 집중적으로 지워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모손 이유가 항간에서 `비바람에 의한 것` 또는 `이끼가 끼어 소똥을 발라 태울 때 손상됐다` 등으로 말한다. 그러나 비바람에 의한 것이라면 비문의 특정 부위만 비바람이 선택적으로 몰아쳐 훼손될 리가 없으며, 소똥을 발라 태웠다 해도 비의 특정 부위만 손상됐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3면 우측 하단부는 사진에서만 봐도 인위적인 파괴의 모습이 선명하다.
결국 참모본부는 변조를 위해 `신묘년조`를 조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최소 글자의 변조로 최대의 효과를 낼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 글자가 바로 `渡海破`부분의 `海`다. 만약 그들이 변조를 위해 비의 표면을 갉아 내는 방식을 택했다면 다른 글자와의 높낮이가 맞지 않아 금방 들통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획수가 적은 기존의 글자인 두 `二`자 위에 가획(加劃)을 해서 바다 `海`로 변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들의 범죄는 치밀했고 일단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는 들통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문맥의 충돌뿐 아니라 글자의 배열도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비에는 원래 글을 바르게 정렬하기 위해 위아래로 반듯한 금인 종선(縱線)을 그었다. 그런데 `海`자는 다른 자들에 비해 삼수변 의 부분이 테두리 선에 걸쳐 있다. 이는 1981년 중국 탁본가 저우윈타이(周雲台) 탁본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데 중국의 사학자 겅톄화(耿鐵華)가 발견하였다.
위대한 영웅의 업적을 기록하는 국가적인 공사에 당대의 문장가는 물론 최고의 서예가와 석공이 작업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가들이 참여한 비문 공사에 문맥이 틀리거나 글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든 일본 참모본부에서 치밀하게 변조했지만 이러한 흠결은 미세하게 남게 됐고, 이것으로 인해 조작의 꼬리가 잡히게 된 것이다. 완전범죄가 될 뻔했지만 성공하기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현재 일본 황실의 지하 수장고에는 숨겨진 보물이 많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론 기록과 근거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성격상 사카와가 가져온 변조 되기 전의 최초 탁본이 이곳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증거인멸을 위해 완전히 없애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변조 전의 탁본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