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4 23:01 (월)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⑧ 문맥으로 본 문장의 모순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⑧ 문맥으로 본 문장의 모순
  • 도명스님
  • 승인 2023.05.22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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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최근 윤 대통령은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참관국 자격이긴 하지만 세계 주요 지도자들의 모임에 초청되었다는 것만 봐도 우리의 국력이 얼마나 신장 됐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앞으로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력과 함께 강한 외교력을 갖추어야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특히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외교란 생존과 번영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국정 분야이다.

외교가 밖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일이라면 역사는 안에서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역사란 모든 이에게 중요하지만 특히 위정자와 정치인에게는 선택이나 취미가 아니라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역사를 모르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외교에선 백전백패요, 국정에선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역사라는 우리의 뿌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미래라는 가지를 힘차게 뻗어 나갈 수 있겠는가. 과거지만 광개토태왕릉비를 변조한 가해자는 현재 일본의 전신인 일본 제국주의다. 다음에라도 대통령께서는 오욕의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기시다 총리에게 능비의 한ㆍ일 공동연구를 제안하셨으면 한다.

한편, 능비의 영락 5년 을미년의 기록에 나오는 소위 `신묘년조`기사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했다"는 기록은 변조됐다. 그 이유는 첫째, 왕의 행적을 편년으로 기록한 이 비의 성격상 신묘년의 사건은 신묘년에 기록하며 4년이 지난 을미년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왜가 백잔과 신라를 격파했다"는 을미년의 저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제와 신라는 신묘년부터 을미년까지 적어도 4년간 왜의 신민이 되어 있는 상태라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그 어느 사서에도 없다. 설사 위의 기록을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왜가 백제를 점령한 기간은 고작 4년이다. 그런데 왜가 4년 동안의 백제와 신라점령을 근거로 서기 369~562년까지 200여 년간 신라와 가야까지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었다는 일제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날조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태왕의 능비가 임나의 세 근거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는 것 자체가 비학문적이며 조작의 냄새가 다분히 난다.

만일 신공황후가 369년부터 한반도의 가야와 신라를 이미 점령했다면 22년 후인 391년 신묘년에 다시 침공해 점령했다는 것 또한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점령한 나라를 어떻게 다시 점령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내용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능비의 기록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내세웠다는 점은 그들이 비를 변조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 일각에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百殘□□新羅 以爲臣民`이란 일본 측의 해석을 그대로 믿는 반면,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민으로 삼았다"는 `百殘新羅 舊是屬民`이란 기록은 믿지 못하겠다는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도 한다.

둘째, 왜와 백제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능비 전체의 기사에서도 백제와 왜는 늘 연합하는 동맹 관계였는 점이다. 그런데 일제의 해석에 의하면 서로 친한 친구가 이유도 없이 싸웠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백제와 왜는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그런데 원수가 되었다`라는 식이다. 이전과 이후의 기록에서도 백제와 왜의 직접 충돌은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동맹이었던 왜가 뜬금없이 백제를 공격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장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이는 비문을 변조했기에 문맥까지 틀어져 버린 것이다.

일제의 해석대로라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그해 신묘년이나 다음 해 임진년도 아닌 5년 후인 병신년이 되어서야 가해자 왜가 아닌 피해자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으로 도무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을 징치(懲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만 봐도 능비의 변조는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변조했는가를 앞으로 규명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일본과 중국의 주류 사학자들은 능비가 변조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릉비에 관해선 서로가 끈끈한 밀월 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중국이 주장하는 `한사군 한반도설`과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 가야설`을 서로 지지해주어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역사패권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자 하기 때문이다.역사에선 우리는 아직도 눈뜨고 코 베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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