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⑦ 비문 조작 증거 `왜구대궤`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⑦ 비문 조작 증거 `왜구대궤`
  • 도명스님
  • 승인 2023.05.15 2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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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칼럼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지난주 광개토태왕릉비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한겨레 신문에서 났다. 1900년대 초부터 탁공이 비에 석회를 발랐고 변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1913년 일제가 관변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를 단장으로 능비를 조사해 200여 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유독 `渡海破`가 기록된 부분은 빠졌다고 한다.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중요한 부분인데도 빠진 이유는 변조의 흔적이 있어 일부러 피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일본은 `도해파` 부분의 변조는 없었다고 하며 국내의 일부 학자들도 이에 동조한다.

이들은 고구려가 자신들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거짓으로 왜를 끌어들였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이런 비루한 안목을 가졌으니 일본의 역사 왜곡의 재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일제의 역사 왜곡은 능비에 있는 `도해파`와 `임나가라`로부터 시작됐고 일제는 비문을 변조한 이후 1889년 해석을 공개했다. 그리고 왜곡된 해석을 한 50여 년 지난 1930년대 말에야 겨우 정인보 선생의 `고구려 주어설`이 나왔다. 일본이 역사 왜곡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무관심으로 그들의 변조가 오랫동안 먹혔다는 사실이다.

능비는 왕의 업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육하원칙으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또한, 하나의 사건을 말할 때는 기, 승, 전, 결에 의해 물 흐르듯 서술하고 있으며 이해하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세상의 모든 문장들이 그러하듯 하나의 스토리를 말할 때, 앞과 중간 그리고 끝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앞의 내용이 따로 있고 중간과 끝의 내용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문장이라 할 수 없다. 글의 목적이 뜻의 전달을 통한 소통인데 앞과 뒤가 일관성이 없다면 그 글은 글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 일반 사가(私家)의 글도 그럴진대 왕가(王家)에서 선왕의 업적을 기록하는 고귀한 비문에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비문의 글을 쓴 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고 쓰고 난 후에도 몇 번의 감수를 거쳤을 것이다. 글씨를 쓴 사람도 최고의 서예가였으며 비문을 돌에 새긴 장인도 최고의 석공이 참여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선 비문의 내용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알려면 각각의 사건을 살펴 문맥에 이상이 없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렇게 보아 문제가 없으면 변조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상식적 차원에서 비문의 문장을 보았을 때, 다른 곳에서는 글자의 결실로 인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문맥의 문제는 전혀 없다. 그러나 유독 `신묘년조`는 문맥이 단절되어 있고 내용도 자체 충돌하고 있으며 비문 전체의 시각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온다. 때문에 비문은 변조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일제의 스파이 사카와 중위가 일본육군 참모본부로 가져간 최초의 탁본인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살펴보면 신묘년조 뿐 아니라 능비의 다른 곳도 이미 변조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사카와는 이미 `경자년조`의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다"를 왜만왜궤(倭滿倭潰) "왜구가 가득 찼고 왜를 궤멸하였다"로 바꾸었다. 이처럼 주어인 왜가 목적어인 왜를 궤멸한다는 것으로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능비의 의도적 변조는 이미 존재했다. 이러한 변조는 1981년 뛰어난 탁공인 주운태가 탁출한 탁본을 근거로 왕건군이 발견했다.

일제는 비문의 변조를 위해 1884년 사카와가 가져온 탁본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와 아오에 슈(靑江秀)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비밀리에 연구했다. 그리고 5년이나 지난 후에 공개했다는 것은 변조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카와의 탁본에서 드러난 것처럼 변조의 사실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대왕의 업적을 과장하여 기록했다" , "조작의 확정적 증거가 없다"는 일각의 주장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일제가 비문을 조작한 명확한 증거는 渡海破 부분을 변조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이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유리한 구절이 이미 나오는데 세상에 즉시 공개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학문 중 역사학은 진실 규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이다. 그러나 학문적 진영 논리나 권위 또는 국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학자적 양심을 위배하는 일부의 학문적 자세는 심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140년간 동안 한ㆍ중ㆍ일 삼국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비문의 원래 내용을 규명하는 시도를 통해 실재했던 위대한 고구려 역사를 복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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