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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소통한 조선의 경연관
임금과 소통한 조선의 경연관
  • 이광수
  • 승인 2023.05.14 2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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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경연관은(經筵官)은 고려ㆍ 조선시대 국왕의 학문지도와 치도강론(治道講論)을 위해 설치한 관직이었다. 경연관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문관으로서 대개 현직과 겸직시켰다. 임금과 토론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명예로운 자리로서 여러 가지 특별대우도 받았다. 경영관제도는 고려 초부터 시행되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1392년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의 경연제도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세종대왕 때 집현전에 설치된 후 성종 때 경국대전에 제도화 되어 완성되었다. 경연관직은 정1품 (영의정, 좌.우의정)영사 3인, 정2품(판서)지사 3인, 종2품(참판)동지사 3인, 정3품(당상관) 참찬관7인, 정4품 시경관, 정5품 시독관(侍讀官), 정6품 검토관, 정7품 사경(司經), 정8품 설경(說經), 정9품 전경(典經)으로 구성된 국정자문기관이었다. 영사는 삼정승이, 참찬관 이상은 중신들 가운데서 선임했으며, 시강관은 홍문관 관원들이 겸직했다. 문무 2품 이상 관원 중에서 별도의 경연특진관을 선임하기도 했다. 경연마다 모두 참석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경연 주제에 따라 참여 인원수가 달랐다. 조선후기에는 성혼 같은 유명 재야유학자들도 초빙경연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경연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유교학문교육 기능과 정치 기능이다. 본래 목적은 학문과 교육기능으로 군주와 신하들이 함께 유교경전을 연구함으로써 국정운영의 기초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각종 유학서적의 편찬과 보급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경연에 가장 많이 참석한 군주는 세종대왕과 정조임금이었다. 학문을 좋아한 세종대왕은 즉위 32년간 600회가 넘게 경연에 참석했으니 2주에 한 번꼴로 참석한 셈이다. 천재 정조임금은 자신이 발굴한 젊은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을 경연에 참석케 해 교육시켰다. 세종과 정조가 참석한 경연 때 두 임금의 해박한 경전지식 때문에 사전학습이 미흡했던 신하들은 예리한 질문에 진땀을 뺐다고 한다. 정조임금은 그때마다 신하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바람에 참석 신하들이 전전긍긍했다. 성군과 명군이 그냥 되는 게 아님을 경연관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연관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주로 학문연구(경전해석)에 치중했으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역기능과 순기능이 발생하기도 했다. 왕의 실정을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이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바람에 경연 참석을 꺼리는 임금들이 있었다. 조선 초기 왕권강화를 도모한 태종은 경연 참가를 일부러 회피했다. 주색잡기로 국정을 문란케 한 패주 연산군과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경연제도를 아예 폐지시켰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지은 죄가 커서인지 대쪽 같은 경연관들의 입바른 소리와 간언(諫言)이 듣기 싫었던 것이다.

임진ㆍ정유재란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무능한 군주 선조는 공부머리는 좋아 경연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경연관들의 간언에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경연 분위기를 흐리게 하기 일쑤였다. 서해 유성룡의 문인이었던 정6품 경연검토관 이준(李埈)은 선조의 실정을 비판하는 간언을 서슴치 않았다(선조36, 1603년 선조실록). `ㆍㆍㆍㆍ한 나라의 임금은 강건을 귀중하게 여기지만 반드시 유화한 마음을 지녀야 광명이 두루 비치어 사사로운 뜻(간신들의 참언)이 광명을 가리지 않사옵니다. 범상한 군주는 쉽사리 교만하게 되고, 지혜가 남보다 뛰어난 군주는 아랫사람들을 경시하고 자신이 빼어난 임금인 체하는 병폐가 있다고 했습니다ㆍㆍㆍㆍ`. 그리고 `정개천`이라는 기개 높은 재야선비가 간신 정철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을 두고 선조가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고 고언했다. 선조가 머리는 뛰어났지만 국난 등 국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우유부단한 행동을 빗대어 성토하는 말이다. 이에 선조는 언성을 높여 안색을 바꾸고 `이준이 어떤 사람인고. 경상도 사람인가. 말이 조용하지 못한 데다 잘 살피지 못한 점이 있다`며 언짢은 표정으로 노기를 띠었다고 한다. 이에 훗날 사관(史官)은 이렇게 논한다. `ㆍㆍㆍㆍ사람들은 도리를 잃게 됐으니 옛일을 가지고 오늘날의 상황을 증험해 보면 위급하게 됐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충성스러운 신하의 말에 임금(선조)은 언성을 높이고 안색을 바꾸며 귀담아 듣지 않았다. 간신이 선비를 죽인 일을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여 언로가 더욱 막히고, 지극한 원통함이 쌓이게 됐으니 재변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사관의 선조에 대한 날선 비판이 서릿발 같다.

이처럼 수백 년 전 조선시대였지만 군주와 신하의 거침없는 의사소통은 경연제도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최첨단 21세기인 지금, 정부와 국민, 정부와 정당, 각급 사회단체간의 의사가 불통인 채, 대립과 갈등만 키우고 있으니 시대착오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경연관제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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