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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디자인과 에피소드 기억
캠퍼스 디자인과 에피소드 기억
  • 이범종
  • 승인 2023.05.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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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범종 인제대학교 방사선화학과 교수
이범종 인제대학교 방사선화학과 교수

캠퍼스라는 말에는 낭만이 들어있다. 그것은 사회인이 되기 전에 젊은 시절의 추억이 곳곳에 배어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캠퍼스를 구성하는 다양한 공간, 즉 강의실, 도서관, 카페, 운동장, 오솔길, 연못 등에서의 에피소드를 많은 사람이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기억은 낭만적이다. 필자는 평생을 캠퍼스에서 보냈으면서도, 이들 공간에 대해 교육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스트레인지(Strange)와 배닝(Banning)이 쓴 `캠퍼스 디자인`(배상훈 외 공역, 2019)이라는 책을 보고 비로소 바람직한 캠퍼스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학생이 성공하는 대학이 되려면 캠퍼스 환경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을지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캠퍼스 환경은 대학의 물리적 공간, 구성원 집합체의 특징, 대학의 경영 조직, 대학 사회와 문화 등을 아우르는 개념인데, 본 글에서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캠퍼스 환경으로 범위를 좁혀 말하기로 한다. 그것도 필자의 캠퍼스에 관한 `에피소드 기억`에 의존한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 캠퍼스 디자인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에피소드 기억 1982: 1981년에 서울의 홍릉 수목원 근처의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란 이름으로 통합됐다. 낮에는 두 캠퍼스 사이를 셔틀버스가 오갔지만, 밤에는 이것이 끊어졌다. 학교에서는 홍릉 수목원 뒤로 오솔길을 만들어 두 캠퍼스를 연결했는데, 이 길은 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울창한 숲길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면 동작을 감지해 허리 높이의 조명이 저절로 켜지고 사람이 지나가면 꺼졌는데, 이것이 오히려 누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나거나 뒤에서 쫓아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에피소드 기억 1994: 이해 겨울방학을 대학원생과 함께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보냈다. 나고야대학에는 정문이 없었고 곳곳을 통해 시민들이 캠퍼스에 드나들 수 있었다. 나와 학생은 식사를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했는데, 식당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포함해 시민들이 종종 보였고, 여분의 음식은 포장도 해갔다. 더구나 구내 생협(生協)에서는 장을 보러온 아주머니가 보이고, 중앙도서관에 가면 공부하러 온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도 있었다.

에피소드 기억 2009: 이 해는 연구년을 맞아 규슈대학의 이토 캠퍼스에서 4개월간 객원교수로 지냈다. 도시 외곽의 이토 캠퍼스는 도심의 구 캠퍼스를 이전한 곳인데, 21세기에 지어진 캠퍼스답게 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검색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의 출구를 통해 선택한 책이 스르르 내려왔다. 도서관이 전자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보니 서가는 어떻게 생겼는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도서관 로비만 보고 나왔다.

에피소드 기억 2023: 몇 달 전의 일이다. 서울대 오세정 총장의 임기가 끝나고 그간의 성과를 소개하는 동창회 메일을 받았다. `샤`모양 조형물로 유명한 서울대 정문 아래가 보행자 전용 광장으로 바뀌고, 이곳을 지나던 4차선 도로를 옆으로 옮겼다고 했다. 아울러 본관 앞 잔디광장 지하에 주차장을 설치하고, 잔디광장을 학생에게 다용도로 개방한다고 했다. 정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거리가 문화ㆍ예술의 광장이 될 거라고도 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직접 보고 왔다. `샤`모양 정문 앞은 학생과 시민들의 포토존이 돼 있었다.

위의 네 가지 에피소드는 각각 안전 캠퍼스, 열린 캠퍼스, 첨단 캠퍼스, 환경 캠퍼스라는 키워드를 생각나게 했다. 40년 전에 동작 감지 조명을 설치한 것은 앞선 결정이었다. 다만 지나가면서 조명이 꺼지니 여전히 무서웠다. 일찍이 생태숲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이제는 조명뿐만 아니라 CCTV와 비상벨 등의 안전설비가 곳곳에 더 구비되어야 하리라. 학생이 오래 머무르고 싶은 캠퍼스가 되려면 안전하고도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나고야대학의 경험도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지자체와 함께 상생을 모색해야 하는 현재의 대학에게 지역사회를 향한 캠퍼스의 개방은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캠퍼스에 시민을 위한 시설도 들어오고 울타리가 없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10여 년 전의 규슈대학 도서관 시스템은 지금 시점에서도 한참 앞섰다. 초ㆍ중등과정에서 최신의 첨단 학습법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 옛날로 돌아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곤란하다.

현재의 Z세대 학생들, 그리고 10년 뒤에 들어올 알파(α) 세대 학생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들이다. 대학이 이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습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 대학은 외면당할 것이다. 캠퍼스 곳곳에서 미래 사회를 먼저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나의 서울대 방문은 나에게 사람 중심, 환경 친화 캠퍼스를 생각나게 했다. 사실 이미 많은 대학이 캠퍼스 환경을 개선했다. 서울대는 여전히 이런 점에서 다른 대학에 비해 뒤져 있다. 1970년대의 황량한 캠퍼스 모습이나 현재의 건물과 자동차로 점거된 갑갑한 모습은 모두 좋은 캠퍼스 환경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는 다양한 키워드를 고려하여 세심하게 캠퍼스를 디자인함으로써 학생이 성공하는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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