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완벽한 객관은 존재할까? 누군가 역사적 사실을 당대에 기록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주관에 따라 기록의 차이는 다소 있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를 검증하기 위해선 엄정한 사료 비판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명분으로 역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는 원칙을 벗어난 근거 없는 의심과 주장은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역사적 기록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때론 합리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적인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 교수 주장처럼 `고구려의 욕망`이란 실재하지 않는 관념을 도출해 능비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학문적 자세는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논란이 되는 `渡海破`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능비의 다른 모든 기록들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먼저 능비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영락대왕ㆍ374~412)의 일대기를 살펴보자. 그는 갑술년에 탄생하여 신묘년인 서기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4년 후, 을미년인 영락 5년 패려를 정벌한다. 여기에 百殘新羅~ 로 시작하는 신묘년 기사가 등장한다. 병신년인 영락 6년,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잔국(백제)을 토벌했다" 영락 8년에는 숙신을 공격해 남녀 300명 포로로 잡았고, 숙신이 조공을 받치며 복종한다. 영락 9년 `百殘爲誓 與倭和通` 즉 "백제가 복종하겠다는 이전의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태왕은 영락 10년인 경자년 즉, 서기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한다. 여기에 `倭背急追 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이란 <경자년조> 기사가 등장한다. 이때 신라 실성마립간이 나라를 구해 준 감사함으로 인해 전에 없이 친히 가솔을 데리고 와서 조공했다. 영락 14년, 왜가 백잔과 연합해 대방의 경계를 침입했으나 토벌되었다. 영락 17년, 보병과 기병 5만이 출동했는데 대상이 누군지는 비문이 지워져 알 수 없다. 이때 노획한 갑옷이 1만 벌이라 한다. 영락 20년에는 동부여를 토벌해 64성과 1천 4백 촌을 귀속시킨다. 그는 영락 22년 임자년인 서기 412년에 승하한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태왕의 이름이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며 즉위한 그해부터 지속적인 정복 활동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위 22년 겨울에 죽었으며 왕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라는 글로 마치고 있는데 비교적 짧은 기록만 남아 있다. 그에 비해 이 능비의 기록은 훨씬 풍부하다.
비문은 총 4면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구성을 보면 1면은 시작부터 6행까지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행적에 관해 말하고 있다. 북부여 출생인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도읍을 세운 과정과 왕위를 물려줄 때, 세자인 유리왕에게 이도여치(以道輿治) "도로서 세상을 다스려라"라는 당부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랐고 영락대왕으로 칭했으며 39세에 승하했다고 한다. 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태왕의 정복 활동과 치적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3면 8행부터 4면 9행 마지막까지는 태왕의 사후, 수묘인의 지정과 관리 방법에 대한 당부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으로 보면 서론, 본론, 결론이 분명하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매우 깔끔하다. 태왕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시간의 흐름인 편년(編年)으로 기록하고 있다. 능비는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기록이라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난해한 부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태왕의 업적에 대한 전기문 형식이라 이치를 따지거나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을 싣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본론이라 할 수 있는 2, 3면의 영토 확장과 전쟁 기사들을 살펴보면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태왕 재세 시에 있었던 정복 활동에 대해 육하원칙에 의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비의 내용들은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능비의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4C 말에서 5C 초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가야를 비롯해 왜ㆍ패려ㆍ동부여 등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두루 알 수 있다. 둘째, `삼국사기`와 주변국의 역사서에서 빠진 역사의 공백을 재구(再構)할 수 있게 한다. 셋째, 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넓혀진 고구려의 실제적인 영토를 알 수 있다. 넷째, 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서지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다섯째, 높이 6.39m 너비 1.35~2m 내외로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비 중에서 가장 크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였다!
고대사부터 시작하여 현재 식민사관까지 정리 되는 날까지 응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