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3:48 (금)
창조적 인문학의 부활
창조적 인문학의 부활
  • 이광수
  • 승인 2023.04.30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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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봄맞이 대청소 겸 집안 살림거리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오래 묵은 집기류와 가구, 낡은 전자제품, 옷, 침구류들을 모두 버리기로 했다. 큰 장롱과 가구, 전자제품은 시 자원봉사단체의 지원을 받아 정리하고, 나머지는 혼자 정리해 쓰레기로 방출했다. 8ℓ용 쓰레기봉투 15뭉치를 2층에서 1층으로 30여 차례 오르내리고 나니 온몸이 쑤신다. 마음만 앞섰지 나이를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성질대로 하다가는 탈이 날 것 같아 쉬엄쉬엄 쉬어가며 하기로 했다. 이미 1t 트럭 분량(5000권)의 책을 방출하고도 남겨 둔 책이 1000여 권이라 다시 정리해 반만 남기고 버리기로 했다. 집필 참고용 신문스크랩과 육필 원고 파일 50여 권도 꺼내 정리했다. 스크랩 파일 정리 중 지난 2008년 6월에 시작된 KTV의 `인문학 열전`(인문학 콘서트) 내용 중 고 이어령 박사의 `인문학 위기`에 관한 스크랩을 발견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이어령 박사 외 박이문, 김열규, 한돈희, 김정운, 하지현, 임헌우 등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이 참여해 인문학적 관점에서 한국인을 탐색했다. 세계가 감탄할 만큼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한국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 고유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한국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토론하는 인문학콘서트에 푹 빠졌던 기억이 새롭다.

이어령 박사는 `인문학은 인간에 관계된 학문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天地人)에 관련된 모든 것이 통찰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는 인문학의 쇠퇴가 급속히 진행되어 위기에 처했음을 경고했다. 그는 인문학은 정해진 `틀의 학문`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관통하는 범우주적, 사상적 근원의 전범(典範)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산업ㆍ금융자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견해의 표출이다. 또한 창조는 어제의 방식이 아닌 오늘의 방식으로서 시대적, 환경적 트렌드에 의해 고착된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했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MZ세대)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억압된 생각을 토해낼 수 있게 기성세대들이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배추 쓰레기를 시래기로 만들어 식용하고, 가마솥에 눌은밥으로 숭늉을 만들어 후식으로 먹는 리사이클링(recycling)문화를 창조적 인문학의 발상이라고 했다.

천여 회에 걸친 외적의 침략으로 점철된 고난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끈질긴 민족정신은 바로 창조적 인문정신의 산물이다. 이어령 박사는 주지하다시피 자신의 서재에 6대의 서버 컴퓨터와 1대의 메인 컴퓨터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상사의 제 흐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체크하고 연구했다. 그의 연구 주제인 한국인의 창조적 발상에 대한 치열한 궁구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러나 지금 막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에는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채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빠져있다. 올해 대학입시에서도 자연과학계열 쏠림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인문계열의 미 지원으로 폐강이 속출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소멸단계에 접어든 느낌마저 든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적자생존의 엄혹한 현실에 내몰린 MZ세대들은 공감과 타협에 의한 소통보다 내가 우선이라는 개인주의로 나와 다른 것과의 동참을 꺼린다. 긍정과 부정의 융합이 아닌 오직 극대극의 대립과 갈등만 존재할 뿐이다.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유아독존과 내로남불은 한국헌정 70년의 정치투쟁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어령 박사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은 장점이지만 단점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바로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에 의한 인구급감과 아버지(권위)가 없는 세대를 우려했다. 억압적인 권위가 아닌 존경의 권위가 사라진 세상을 두려워한 것이다. 따라서 부정의 말보다 긍정의 말로 반전의 역사 기억을 되살려 오늘의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비주류를 주류세계로 끌어들여 한데 품어야 한다. 세계에서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가장 강한 민족이 한국인이다. 자신의 꿈을 프로그램화해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창조적 인문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생각의 파이를 키우고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지금까지 얻은 지식은 지우고(비우고), 새것으로 가득 채워야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선진 한국호의 미래는 바로 이어령 박사가 강조한 디지로그(DIGI LOG: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 사회의 구현이다. 견고한 인문정신의 부활 없는 현시적이며 물질 지향적 경제발전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계 10위의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추락한 아르헨티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인문학 부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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