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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9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윤관의 9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 이헌동
  • 승인 2023.04.2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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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 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1107년(예종 2년)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하는 17만여 명에 달하는 별무반이 여진족을 소탕한 다음 135개의 여진족 촌락을 점령하였다. 약 5000명의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은 포로도 5000명이 넘었다. 이어서 윤관은 점령 지역에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고려 국경으로 삼았다.

약 6만 9천여 호(戶)에 이르는 남쪽 지방의 민호(民戶)들을 이주시켰다. 길주성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건립하여 근거지를 옮겨 불안해하는 민심을 달랬다. 이처럼 성을 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민호들을 정착시키면서 고려의 행정 체제로 편성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동계(東界)의 기사를 검토해 보면 윤관의 출정 목적이 구지수복(舊地收復) 임을 알 수 있다. 고려가 건국한 뒤에 9성 지역을 동계의 삭방도에 포함시켜 관리를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반란과 공격으로 위태로워지자 여진을 정벌한 것이다.

윤관의 9성 위치에 관한 중요한 사료는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두만강 밖 7백 리 선춘령에 `이곳에 고려의 국경을 삼는다`는 글자를 새긴 윤관의 비가 있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고 선춘령이 두만강 동북 7백 리"라고 하여 9성이 두만강을 넘어 만주 깊숙이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윤관의 9성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윤관 9성에 대해서 고려국경을 아래쪽에 그려놓고 위쪽으로 세 가지 설을 모두 넣은 길쭉하게 보이는 괴이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 세 가지 설은 아래와 같다.

첫째가 `함흥평야설`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식민사관으로 9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반도사관에 의거하여 윤관이 주도한 고려 축성지를 함흥, 홍원, 북청 등지로 한정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반도사관에 의거한 초보적인 지표 조사를 통해 함흥평야 일대에 9성의 성지를 비정하였다. 이것이 한국사의 정설이 되어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둘째는 길주 내지는 마운령(磨雲嶺)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도 일대에 9성이 있었다는 `길주 이남설`이다. 한백겸과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설은 한백겸이 함경도 마운령에서 발견된 석추구기와 돌기둥을 윤관이 세운 선춘령 경계비로 추정하면서 비롯된 잘못된 인식이었다. 마운령에서 발견된 석추구기와 돌기둥 등 비석은 진흥왕 순수비인 마운령비로 1929년 최남선에 의하여 밝혀졌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사대모화주의에 의거하여 고대사부터 조선시대 당대사까지의 역사강역을 모두 한반도 이내에 설정하였다. 이런 역사인식에 따라 길주 이남설을 주장하였다. 낙랑군 평양설도 한반도에 온 적이 없는 기자가 평양에 살았다고 인식한 사대모화 소중화사관에 따른 주장이다.

셋째는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을 근거로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으로 간주하여 9성이 산재되어 있었다는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설은 고려말의 옛 영토 회복운동과 명나라와의 외교, 조선 초기의 6진(六鎭) 설치 당시에 강조되었던 견해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래서 식민사학 유풍에서 벗어난 강단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이 설을 주장하고 지지하고 있다.

두만강 이북설이 맞으면 거기에 맞는 고려 국경을 역사 교과서에 그려서 교육하면 된다. 괴상하게 보이는 지도가 아니라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 연구 결과처럼 고려국경을 그리면 된다.

윤관 9성의 설이 3개라서 그리는 논리라면 한사군 위치에 관해서도 한반도설과 요서설, 요동설을 지도에 모두 그려 넣어야 한다. 중국 고대사서는 대부분 요서설이다. 그러나 주류 강단사학계는 낙랑군 평양설만을 바탕으로 지도를 그려놓고 교육하고 있다. 그래서 식민사학 유풍에 젖은 강단사학이고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문헌과 현지답사로 공험진과 선춘령 위치를 찾고자 시도한 이인철 교수는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압록과 고려의 북계>라는 책에 실려있다.

이 논문에 보면 선춘령은 현재 중국 지도에 고려령(흑룡강성 동녕현 홍석립자촌 남쪽 수분하 건너편)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현지에서 만난 노인은 "수분하 건너편의 산에 오래된 성터가 있고 그 성터가 고려국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였다.

고대 공험진인 오배산성은 수분하 중상류 일대를 통제하면서 침략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산성이었다. 오배산성은 선춘령(현 고려령)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로 5㎞ 떨어져 있다.

식민사학 유풍에서 벗어나 역사 사실을 기반으로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역사학계가 못하면 국민과 정치인들이 각성하여 정부에서라도 해야 한다. 이런 명백한 것부터 바꾸어서 역사 주권과 영토주권을 확립하여 바른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외교나 국방, 통일 등에 대처하도록 교육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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