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8:21 (금)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④ 논란의 신묘년 기사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④ 논란의 신묘년 기사
  • 도명스님
  • 승인 2023.04.24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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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사정담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역사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며 진실이 종종 거짓에 의해 묻힌다. 피해자의 입장에선 진실이 밝혀져야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선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조차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성숙하게 된다.

광개토태왕릉비는 1889년 공개 후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한ㆍ중ㆍ일 삼국은 주목했다. 하지만 얼마 후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중심에는 소위 `신묘년과 경자년 기사`가 있었다. 신묘년 기사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일제는 서기 4세기 신공왕후가 한반도 남부를 정복했다는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악용하였다. 그리고 경자년 기사는 "왜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러"라는 내용이다. 일제는 여기에서 말하는 임나가라를 한반도 남부의 가야, 그중에서도 김해의 금관국 또는 고령의 대가야 지역으로 비정해 `임나가야설`을 만들었고 이 또한 임나일본부를 만든 토대가 되었다.

외세에 억눌렸던 조선의 백성은 민족의 영웅 광개토태왕릉비의 발견으로 한껏 고무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가라`라는 임나일본부의 확실한 근거가 이 비의 내용으로 증명되었다고 쾌재를 불렀으며, 이로 인해 조선 백성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꺾이게 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해석이 문제가 있음은 알았지만, 이를 극복할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 속만 끓이고 있었다. 일제에게 유리한 해석의 흐름이 50년 가까이 이어지던 1930년대 말, 민족주의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신묘년 기사의 주어가 `일본이 아닌 고구려`라는 논리를 펴면서 일본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능비가 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선왕의 공적을 기록한 내용이므로 일본이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의미 있는 항변이었지만 광범위한 공감을 얻지는 못했고, 능비를 세상에 처음 공개하여 해석마저 주도한 일제의 교묘한 술책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주장은 20여 년이 지난 1955년에야 서울에서 책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이후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에서 일제가 석회를 능비에 발라 비문을 조작했다는 석회도부설(石灰塗付說)로 한ㆍ중ㆍ일 사학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그의 공격적인 주장에 일본은 전전긍긍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별다른 대응을 못 하고 10여 년이 지날 즈음, 중국 길림성 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왕건군(王建君)이 1984년 논문을 발표해 이진희의 변조설을 부정했다. 능비에 석회가 발라진 것은 사실이나 일제의 소행이 아니라 거친 능비에 석회를 발라 양질의 탁본을 얻고자 했던 탁본 업자 초천부, 초균덕 부자가 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이진희 교수의 석회도부설도 이후 추동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왕건군은 1985년 <요미우리신문>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이 교수와 치열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한편, 지금 일본과 한국학계 일각에선 능비의 내용이 고구려 중심적이며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 교수는 능비의 해석에 있어 그의 저서 <만들어진 고대>를 통해 "일제의 제국주의적 욕망과 한국의 민족주의적 욕망이 투사된 결과이다"라는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는 신묘년 조에 대한 한ㆍ일 양국의 역사적 갈등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지만 `둘 다 틀렸다`는 관점으로 인해 오히려 능비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이 기록된 중국의 문헌과 국내 공영방송 KBS의 역사 다큐멘터리는 비의 내용이 사실임을 충분히 증명했다. 능비의 기록과 1~2년 차이가 나는 <삼국사기>의 기록들도 교차 검증을 해보면 능비의 내용이 더욱 정확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이 비는 고구려 자국의 당대 기록이며, 이 기록들이 허위라는 그 어떤 증거도 없기에 신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고구려는 당대의 패자로 자부심이 대단했고, 아들 장수왕은 선왕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만 기록하여도 충분하였기에 굳이 과장을 통해 업적 부풀리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동안 일본 우익과 그에 동조하는 국내의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당대의 기록이 아니며 삼국 초기의 기록은 전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당대의 기록인 태왕의 능비를 믿느냐 하면 고구려가 자국을 너무 과장하여 기록했기에 이 또한 믿을 수 없다 한다. 이래도 저래도 안 믿겠다는 자세이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그들에게 진실이란 불편한 장애물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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