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0:44 (금)
김은일 매일시론 지리산역사관서 본 빨치산ㆍ제주 4ㆍ3사건 ②
김은일 매일시론 지리산역사관서 본 빨치산ㆍ제주 4ㆍ3사건 ②
  • 김은일
  • 승인 2023.04.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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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일 변호사
김은일 변호사

이처럼 논란이 분분할 때 우리가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팩트밖에 없다. 제주 4ㆍ3 사태의 팩트는 무엇인가. 김달삼을 필두로 한 제주도 남로당위원회 소속 35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과 우익인사의 집을 새벽 2시를 기해 습격하여 공무원과 우익 인사 및 그 가족들을 학살한 날인 4월 3일을 가리키는 것이 제주 4ㆍ3 사태이다. 문제가 되는 양민의 희생이 발생한 것은 제주 4ㆍ3폭동이 아니라 이에 대한 진압을 할 때인데, 진압은 4월 3일이 아니라 그로부터 6개월이나 지난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즉, 김달삼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이 공무원과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했지만 10월까지는 협상에 주력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남로당 유격대 350명이 폭동을 일으킨 날인 4ㆍ3과 제주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비극을 연결 짓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고, 4ㆍ3 폭동과 제주도 양민의 희생은 완전히 별개로 다루어야 할 사건임을 인지하게 된다. 오히려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에 젖어 일으킨 무모한 폭력으로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킨 원인을 제공한 것이 4ㆍ3 폭동이라 하겠다.

4ㆍ3 폭동의 진압이 11월부터 본격 시작된 이유는 그해 10월에 발생한 여순반란사건과 연관이 깊다. 엄연한 국군인 여수14연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은 그해 8월에 단독정부를 갓 구성한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위기감을 초래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고 인민군과 합세하겠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때 국군과 경찰, 민간인 5000명이 학살당했다. 이때부터 이미 내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쟁, 특히 이념전쟁인 내전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발생시킨다. 해방 후부터 1953년 휴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상자 포함 남한의 군인들만 110만 명이 희생되었다.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남한에서만 24만 5000명이 학살되었는데, 공산당에 의한 학살이 13만 명이었다. 영남에서는 국군에 의한 학살이, 지주들이 많았던 호남에서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많았다. 제주도에서는 2019년 4ㆍ3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1만 4000여 명의 총희생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00여 명, 반란군에 의한 희생자가 1700여 명으로 확인이 되었다. 반란군에 의한 희생자가 1700명이나 된다는 것은 진압 이전까지는 반란군들이 압도적인 가해자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반란군, 인민군이 더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고 해도 대한민국 정부군에 의해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됐다면 마땅히 위로하고 추모해야 한다. 그래서 과거 정부에서 특별법을 만들고 추모 공원을 만들어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을 추모하고자 노력하였고, 박근혜 정부 때는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하지만 비극의 원인 제공자는 덮어두고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것만을 내세워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각색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4ㆍ3을 공산폭동이 아닌 자발적인 민중봉기로 꾸미는 일을 시작하더니, 문재인은 공산통일을 목표로 일으킨 남로당의 반란을 일컬어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열망한 제주"라고 분칠을 하며 제주를 팔아서 북한의 생각을 대변했다. 이것은 민주당이 입만 열면 떠드는 통일과 평화가 공산화로의 통일과 공산화 상태에서의 평화임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 아닌가. 급기야 이재명은 최근 4ㆍ3 기념식에서 `민중항쟁`이라는 말까지 갖다 붙이기까지 했는데, 이대로 두면 김달삼을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한다고 나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주 4ㆍ3 특별법을 제정하고, 4ㆍ3 평화 공원을 설립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 4ㆍ3은 공산폭동`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모든 일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이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4ㆍ3에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11월에 발생한 진압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을 추모하자면 혼돈의 시대에 한반도 전역에서 반란군과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수많은 양민들도 빠짐없이 추모하여 역사적 사실의 양면을 다 들여다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 찾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만약 해방 후 제주 4ㆍ3을 포함한 일련의 폭동이 성공하였다면, 당시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의 무고한 사람이 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운 좋게 살아남은 어떤 사람은 김일성 3부자의 노예가 되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복종할 수밖에 없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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