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0:44 (목)
도명스님 신사정담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③ 세상에 다시 출현하다
도명스님 신사정담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③ 세상에 다시 출현하다
  • 도명스님
  • 승인 2023.04.17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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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
(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최근 일본은 아예 노골적으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엄연한 독립국인 지금도 이럴진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을 맺은 구한말의 조선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직 나라는 있었지만, 일제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해,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이 만주 집안에서 광개토태왕릉비를 발견했고, 1884년 일제의 밀정은 탁본을 확보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윽고 그들의 공작에 의해 능비는 변조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첫째, 끊임없이 변조설에 휩싸인 신묘년 조의 `渡海破(도해파)` 부분에 대한 변조의 증거를 규명하고자 한다. 둘째, 그것을 근거로 변조 전의 원래 글자와 지워진 결실 자 두 자가 무엇이었는지 합리적 가설에 의해 복원하고, 신묘년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셋째, `任那加羅 從拔城(임나가라 종발성)`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통해 임나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이 아니고, 대마도 또는 일본 열도라는 것과 종발성이 명사가 아닌 동사임을 밝히고자 한다.

이 비의 주인공은 광개토태왕이다. 공식적인 명칭인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강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그는 서기 374년에 태어나 부왕인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향년 18세인 서기 391년 왕위에 올랐다. 22년간 재위하다 서기 412년 3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시호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생전 수차례의 정복 활동으로 영토확장에 유례없는 공적을 남겼으며 대제국 고구려의 굳건한 기틀을 세웠다, 전 국민대 이종항 교수는 태왕을 가리켜 동방의 알렉산더라고 했다. 또한 "서양에 로제타석이 있다면 동양에는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비는 광개토태왕의 승하 2년 후인 서기 414년, 그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세운 훈적비(勳績碑)이며 능비이다. 세월이 흘러 비는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잊혀다가 중국으로 사신 갔던 이들의 기행문에서나 `요나라, 금나라의 비`일 것이라는 추측으로 기록에 간간이 등장했을 뿐이었다.  한편, 일본은 19세기 말 정한론을 통해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의 정복을 꿈꾸었다. 임진왜란 전에도 사전에 첩자를 보내 우리나라를 염탐했던 것처럼 1880년 일제는 육군 참모본부에서 스파이 사카와 가게아키(酒勾景信) 중위를 중국에 파견했다. 그는 중국 내에서 한의사로 위장해 수년간 활동하던 중 1883년 만주 통구에 있는 이 비를 발견한다. 그는 곧 탁본을 입수해 1년 후인 1884년 일본육군 참모본부로 가져갔다. 참모본부는 5년 후인 1889년에야 극우 학술지 『회여록』 제5집을 통해 「高句麗古碑文」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나 비의 내용과 중요성을 감안할 때 이들의 행동은 매우 의문스럽다. 당시 일본 학자들의 학문적 수준에서 보면 1800여 자가 못 되는 비문을 풀이하는데 이토록 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일본의 또 다른 음모가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하게 한다. 그래서 비의 발견 후 14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조설이 제기되는 것이다. 

 능비가 조작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일본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渡海破` 부분이 변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카와가 참모본부로 탁본을 가져갈 당시에도 왜에게 유리한 `渡海破`란 글자가 능비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들은 즉각 세상에 공개했을 것이다. 왜에게 유리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외부에 홍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카와가 가져온 원본에는 `渡海破`가 아닌 왜에게 불리한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때문에 참모본부는 이 부분을 변조하기 위해 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필자가 살펴본 바로 이 비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했다. 하지만 후대 일본 제국주의의 비뚤어진 욕망에 의해 능비는 변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해석도 전혀 엉뚱하게 하였다. 그래서 비가 발견된 이후 수많은 연구와 해석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원래의 글자들이 변조 또는 소실되었으니 변조 전의 탁본이나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영구미제(永久未濟)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태왕의 능비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 잃어버린 옛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진실은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반드시 드러나고야 마는 법이다. 새로운 시각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견해가 이 비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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