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6:45 (금)
당고의 화와 사대사화
당고의 화와 사대사화
  • 이광수
  • 승인 2023.03.19 2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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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방담이광수  소설가
춘추방담이광수 소설가

당고(黨錮)의 화(禍)는 중국 후한 말기에 일어난 지식인 탄압사건으로 당고지옥(黨錮之獄) 또는 당고의 금(禁)이라고 불린다. 서기 166년 후한 말기 환제(桓帝)때 환관의 무리들이 환제를 충동질해 1~2차에 걸쳐 청류당의 이응 등 1000여 명의 선비들을 붙잡아 투옥한 사건이었다. 그때 재판에서 200여 명의 청류당 선비들은 모두 환관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환관들은 외척인 두무 등이 환제에게 고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삼아 청류당을 방문해 향리로 돌려보내고 벼슬만 못하게 금고(禁錮) 처분을 내리는 선에서 그쳤는데, 이를 제1차 `당고의 금`이라고 한다. 환제 사후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太后)가 섭정이 되어 외척인 두무가 실권을 잡았다. 두무는 청류당인의 금고를 해제해 등용하고, 그들과 결탁해 횡포가 심한 환관 무리들을 숙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 나 환관의 반격을 받아 패하자 두무는 자살하고 청류당의 이등 등은 또다시 투옥되었다. 이때 죽임을 당한 자는 100여 명이었고, 사죄(사형), 유죄(유배), 금고처분(벼슬금지)을 받은 자는 7~8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를 2차당고의 화(禍)라고 한다. 2회에 걸친 `당고의 옥`은 진나라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필적하는 사상 탄압으로 유교국 후한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부패한 환관들의 전횡 속에서 황건적의 난(184년)을 맞은 후한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당고의 화`는 지조와 절개를 존중하는 지식인들을 살해하거나 금고에 처함으로써 희대의 권력투쟁사로 기록되었다.

조선 중기의 사대 사화는 정치적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숙청한 사건으로 연산군-중종-명종 원년에 걸쳐 일어난 옥사를 말한다. 조선의 사대 사화는 앞서 말한 후한말기 `당고의 화`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역사시험 단골 소재인 사대사화는 초등학생 때부터 연산-연산-중종-명종, 무오-갑자-기묘-을사 식으로 달달 외웠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피 터지게 싸운 권력투쟁사인 사대 사화는 헌정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쟁의 원류처럼 작용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네 차례의 사화는 조선이 건국된 후 1세기 만에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충돌이자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이었다.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8년)의 갑자사화, 1519(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원년)의 을사사화는 조선당쟁사의 비극적 사건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영남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문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빌미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항우가 회왕을 죽인 고사를 비유한 것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내용을 풍자한 글이다. 이때 평소 김종직과의 사적 감정이 좋지 않았던 간신 유자광은 사림파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조의제문은 선대 세조를 욕보이는 처사라고 연산군에게 고자질함으로써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이때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고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최부 등 김종직의 문인 수십 명이 사형, 유배, 파직당함으로써 영남 사림파 대부분이 몰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갑자사화는 사림파를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했다. 이때 척신들은 윤씨폐비사건에 윤필상 등 훈구파가 관여했음을 폭로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훈구대신들과 살아남았던 사림들도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았다. 무오ㆍ 갑자사화로 당시 명문거족들이 멸문지화의 큰 화를 입었다. 5부자 6급제로 승승장구하던 우리 선조도 사화의 참극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맺힌 비극적인 씨족사가 아닐 수 없다.

기묘사화는 중종 14년 신진사류 조광조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사화이다. 연산군의 학정에 반기를 든 박원종, 성희안 등 훈구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폐하고 이복동생 이역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켰다. 이 때 중종은 젊고 참신한 조광조(趙光祖)를 중용했다. 과격하고 혁신적이었던 조광조는 시정의 폐단을 일소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하는 훈구파의 남곤, 심정 등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거나 유배되었다.

을사사화는 명종 원년에 일어난 사화로 외척간의 권력다툼으로 간신 윤원형 일파가 전왕의 외척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였다.

이처럼 후한 말기 `당고의 화`와 조선 중기 `사대 사화`는 권력다툼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피의 투쟁사였다. 두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권력의 비정함과 정쟁으로 인한 국력 낭비로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였다. 승자든 패자든 권력투쟁의 말로는 `인생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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