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22:21 (목)
존재의 본질 16 견성과 보림수행
존재의 본질 16 견성과 보림수행
  • 도명스님
  • 승인 2023.03.13 2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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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정담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신사정담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인생을 논할 때 쓰는 말 중에 달관(達觀)이란 용어가 있다. 사전에서는 `인생의 진리를 꿰뚫어 보아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넓고 멀리 바라봄`이라고 나온다. 흔히 `어떤 일에 익히 알고 있어 막힘이 없음`이란 뜻의 통달(通達)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미세한 차이가 있다. 선후를 따지자면 먼저 본질을 꿰뚫는 `달관`이 있은 다음에 일에 막힘이 없는 `통달`이 있다. 어떤 분야를 통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넓은 지식을 두루 갖추어야만 깊은 안목이 생겨 소위 고수(高手)가 된다. 한 분야의 고수가 되면 `척 보면 안다`는 안목을 갖추게 되는데,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행착오 속에, 경지에 오르게 된다. 고수가 되기 전 다가오는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앞서간 고수를 가까이 모시고 때때로 점검받는 것이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고 하듯 완성에 이르는 모든 길에는 피땀을 흘리고 다소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과일이 덜 익으면 풋과일이라 하고 먹으면 배앓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익을 때까지 후숙의 기간을 거쳐야 제대로 된 맛과 향기가 나며 몸에도 유익하다. 어린아이는 사람이지만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제대로 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여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제대로 익기 전에는 도인의 반열에 오르기 어렵다. 그래서 구도자는 깨닫기 전의 오전(悟前) 수행을 시작으로 깨닫고 난 후의 오후(悟後)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구도자는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체화하고 일상의 삶에서 흔들림이 없는 경지가 된다. 곧 번뇌 없는 완성자, 부처가 되는 것이다.

오전 수행이란 깨우치기 전의 수행 방법으로 존재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혼자 깊이 궁리하거나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거나 경전을 보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문제는 위와 같이 깨달음을 얻은 후의 일로 과일의 후숙과 같은 보림(保任)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보림이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줄임말로 깨달음을 지키는 과정을 말한다. 구도자가 오랜 노력 끝에 한순간 깨달음의 소식을 얻었더라도 이를 잘 지켜가지 못하면 기존의 습관과 업에 의해 깨달음의 소식은 또다시 흐릿해지고 만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깨닫기 전보다 깨닫고 난 후의 보림이 더 어렵다고 하였다. 견성을 하여도 자기의 업은 무의식을 통해 계속 나타난다. 깨달음을 통해 `깨어있음`이 본인의 삶 속에서 확장되고는 있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때 수행자는 보림수행을 통해 자기의 묵은 습관을 버리고 교정해 간다.

이치는 알아도 몸에 익은 오랜 습관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그 예로 조선 말엽에 태어나 꺼져가던 한국 선불교를 되살린 경허(鏡虛, 1846~1912) 스님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경전을 가르치는 강사로 이름을 떨치던 중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마을을 지나며 죽음의 문제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곧 3년간 두문불출하며 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교화하다가 동래 범어사 뒤에 있는 금강암이란 조그만 암자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는 높은 진리의 안목으로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영남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평소 곡차(술)를 좋아한 그의 습관은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결국 큰절의 주지인 성월스님의 귀에 들어갔다. 이에 화가 난 성월스님은 어느 날 저녁 경허 스님이 머무는 금강암에 올라가 방문을 확 열어젖히니 스님은 혼자 곡차를 하고 있었다.

성월스님은 "스님은 선지식인데 이러한 행동을 해도 됩니까"하고 큰소리로 질타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경허스님은 "理卽頓悟 事非頓除!"(이치는 즉시 깨달았으나 업식은 금방 없애지 못했다)라며 즉시 스스로의 허물을 인정했다. 만약 여기서 경허스님이 "飮酒食肉 無妨般若"(술 먹고 고기 먹는 것이 깨달음에 방해되지 않는다) 라고 변명했다면 성월스님과는 인연이 다했을 것이다. 이치는 분명히 깨달았지만 아직 세속의 묵은 습관을 다 버리지 못했다는 경허스님의 솔직한 모습에 감동한 성월스님은 그를 스승의 예로 모셨다. 이후 큰절과 계명암, 금강암, 내원암의 네 곳에 선방을 개설했고 현재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범어사의 브랜드는 이런 사연으로 만들어졌다.

티벳 속담에 "이해했다고 안 것이 아니며 알았다고 깨달은 것이 아니다. 또한 깨달았다고 해탈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잘 곱씹어 봐야 할 명구이다. 이치를 안다는 견성은 해탈이란 끝 지점이 아니라 해탈로 가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성태(聖胎)를 키우는 보림의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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