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6:22 (목)
존재의 본질 13 텅 빈 충만
존재의 본질 13 텅 빈 충만
  • 도명스님
  • 승인 2023.02.20 2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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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정담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인생을 표현한 말 중에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가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때 빈손이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로 흔히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교훈적 목적으로 사용된다. 오랫동안 불교를 신앙했던 한ㆍ중ㆍ일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 공(空)이란 용어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고 불교를 달리 표현해 공문(空門)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불교철학의 핵심이 `불변의 실체나 현상은 없다`는 공사상(空思想)을 기반하였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또 수도인의 목표인 깨달음을 얻을때 조차 `공을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공`을 배제하고 불교를 논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공(空)을 물으면 `빌 공(空)`의 뜻 그대로 텅 빈 어떤 상태를 연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진정한 의미는 `영원한 실체나 현상은 없다`는 개념에 반해 눈앞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현상은 있다`라는 또 다른 측면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우주는 불변의 실체가 없어 본질적으로 텅 비었지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작용하는 현상은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비었지만 묘한 작용이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영혼을 맑히는 글로 세상 사람들을 위로했던 고(故) 법정 큰스님께서는 이를 풀어서 `텅 빈 충만`이라 했다. 이는 영원한 실체가 없지만 인연과 조건에 의해 온갖 모습을 나타내는 우주의 실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공(空)`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된다. 크게는 물질의 측면과 정신의 측면이 있다. 물질의 입장에서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을 비롯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과 현상들이 조건에 의한 일시적 결합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본질은 결국 비었다고 본다. 이때 일시(一時)란 일 초, 일 분의 짧은 시간만이 아니라 영겁이라는 무한한 시간에 상대되는 모든 시간을 뜻하며 설사 백 년, 천년이라 하더라도 `한때`라는 일시를 면치 못한다. 

한편 현대 과학에서 물질적 우주는 원자와 분자를 넘어 쿼크와 힉스를 비롯한 미립자ㆍ소립자의 세계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물질의 궁극에는 변화하는 상태만이 존재하며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 실체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드디어 현대 과학이 불교 철학을 증명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공(空)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비실재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현상과 물질의 구성원리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공(空)`이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사실인 것이다. 이제 과학의 발달로 인해 우주의 본질은 더욱 드러나게 되었고 인류에게는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깨달음이 가까이 와있기도 하다. 

모든 언어는 생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관념으로 고정된다. 또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관념들은 변형을 겪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존재의 본질을 설명했던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조차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 법칙이라는 틀에 묶이게 되었다. `연기`는 결국 기원 전후에 일어났던 대승불교 시대에 `공`이란 용어로 바뀐다. 그러나 언어 이면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연기와 공은 용어가 다르니 내용도 다를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실상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다.

공의 또 다른 의미는 활용적 측면으로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하며 모든 것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여 년 전 178㎝ 키의 필자는 평소에 키가 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씨름선수였던 최홍만을 직접 만나보고는 깜짝 놀랐다. 필자의 키는 그의 가슴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에 비하면 나의 키는 매우 작았다. 이처럼 모든 가치는 사회나 집단이 처한 입장과 자신의 정한 기준에 의해 선악과 미추 그리고 귀천과 대소가 나누어진다. 

그러나 기준이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고정시킬 수가 없다. 상황 따라 항상 바뀌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적인 법칙과 기준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때론 의지처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를 구속하는 족쇄임을 모른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을 때 `연기`와 `공`에 대해 표현할 마땅한 용어를 찾지 못해 결국 도가(道家)에서 이미 쓰고 있었던 `없다`란 뜻의 무(無)로 잘못 대체했다. 이러한 해석의 오류로 늘 활발하게 살아있는 활공(活空)이 허무주의에 빠진 죽은 사공(死空)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공(空)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잘못한 사람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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