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7:07 (화)
나라 밖을 내다보자 44
나라 밖을 내다보자 44
  • 박정기
  • 승인 2023.02.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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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제후는 적어도 일국의 왕이다. 전국의 크고 작은 왕의 행차가 에도까지 가야 하니 전국의 도로망이 잘 정비되었다. 에도까지 가면서 먹고 자고 해야 한다. 여관이 성업한다. 음식점도 잘된다. 유통이 잘된다. 풍습, 문화가 교류한다. 백성은 살판났다. 

지역사회 경기가 좋아지고 전국의 백성 살림이 역동적으로 되었다. 화폐경제가 활성화하면서 금융 산업이 발달하였다. 조진(서민)들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회계층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돈 많은 상인은 무사 못지않은 실세로 성장했다. 한편 제후들은 죽을 지경이다. 그들은 행차 때마다 경비를 대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느긋한 건 바쿠후(막부). 제후들은 모반할 국력이 점점 없어졌다.

 또 하나 에도시대의 특기할 일은 출판과 관련된 사업이다. 17세기 말 이하라 사이카쿠가 쓴 `호색일대남`이란 오락소설이 히트를 쳤다.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섹스 라이프를 그린 소설이다. 뒤이어 수많은 인기 작품이 출판되었다.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경기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서민들이 글을 알고 여유와 문화생활을 즐겼다는 말이다. 300년 전에 일본은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이다.

△나. 정신주의 
내가 볼 때 일본은 무서운 나라다. 일본인은 좋은 점도 많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일본의 장점은 순수성이다. 정신주의다. 내가 보는 관점이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싫으면 참고만 하시도록. 유리알같이 맑고 순수한 정신주의를 그들은 추구한다. 그냥 마시는 차도 일본으로 건너가면 다도(茶道)가 된다. 살인을 위한 칼 솜씨도 일본에서는 검도(劍道)가 되었다. 예술과 문학이 그렇고, 장인(匠人)정신, 3대나 5대를 잇는 오뎅집도 다 정신주의를 추구한 산물이다. 깨끗한 나라다. 깔끔하다. 항복할 줄도 안다. 정직하다. 안 속인다. 옛날 사무라이는 의심받으면 배를 갈랐다. 와비와 사비라는 일본말이 있다. 다도에서 쓰이는 말로 일본의 문화적 미(美)의식, 미적 관념이다. 소박하고, 조용한 상태를 가르킨다. 참선할 때 무아의 경지? 솔직히 그 경지를 나는 알 길이 없다.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도 있다. 다 다도에서 쓰이는 말이다. `당신을 만나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두 번 없을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하여 모시리라`라는 마음으로 손님을 응대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이다. 모두가 정신주의를 추구하면서 도달하는 순수성, 화경청적의 경지 조화와 존경, 맑음과 부동심의 산물이다.

18세기 초,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날 밤, 미가와국(지금의 아이치현)의 영주인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사무라이 47명이 급습했다. 그들은 영주인 기라의 목을 들고 센가쿠지라는 절 앞에 모였다. 그곳은 바로 사무라이들의 주군이었던 아사노 나가노리의 묘였다. 아사노는 한 해 전, 자기를 모욕한 기라를 죽이려고 칼을 빼들었다가 기라를 죽이진 못했다. 그러나 쇼군이 거처하는 막부 내에서 칼을 뺐다는 게 문제가 되어 쇼군의 노여움을 사 할복을 명받고 자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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