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8:33 (토)
존재의 본질 12 이론에서 벗어나 실감한다는 것
존재의 본질 12 이론에서 벗어나 실감한다는 것
  • 도명스님
  • 승인 2023.02.13 20: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사정담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신사정담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최근 인공지능이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다. AI는 이제 과학 기술이라는 한정된 분야를 넘어 모두가 느낄 만큼 우리의 삶에 가까이 와 있다.

얼마 전 필자도 이 분야의 전문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 로봇, 챗 GPT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광개토 대왕에 대해 질문해 달라"고 주문했다. 질문이 입력된 즉시 AI는 광개토대왕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해주어 필자는 깜짝 놀랐다. GTP가 기껏해야 청소년 정도의 지적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문가 수준의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광개토대왕에 대한 시를 주문하였더니 아주 그럴싸한 시까지 금방 지어냈다. 지금 과학 기술의 진보는 일반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절집에서 농담 반 진담 반 회자되는 얘기가 "과학이 발달하면 깨달음도 필요할까?"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앎인데, AI가 그 역할을 대신해 인간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면 굳이 힘들여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럴듯 하지만 이는 깨닫는 내용과 깨닫는 대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난 잘못된 물음이다. 통상 깨달음은 내용은 앎의 측면과 경험의 측면으로 나뉜다. 앎의 측면을 보면 모든 존재가 실체는 없지만 조건에 의해 생성과 변화 그리고 소멸해 간다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법칙이 적용됨을 깨우치는 것이다. 또한 모든 현상은 인과와 연기(緣起)법의 적용으로 정확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반면 경험적 측면은 이러한 앎이 자신의 의식 전반에까지 미쳐 일상이 지혜롭고 평안해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깨달음의 속성은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 이론과 실제라는 두 측면이 있다.

깨달음에는 언어와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생명의 지점이 있다. 소위 `깨달음의 역설`로 표현되는데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깨달음이 아니다`라는 다소 황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언어와 문자는 주관을 가진 개인의 생각을 거칠 수밖에 없다. 이는 보편성을 담보한 진리의 기준을 벗어나기에, 생각을 기반으로 한 언어와 문자가 사물의 본질을 아무리 빠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이 움직인즉 어그러졌다"고 표현한다. 때문에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즉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순수한 생명현상의 지점을 자각하라고 한다. 사실 놀라운 일은 모든 이들이 이미 이 지점을 경험하고 있지만 자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수 현상의 지점은 심지어 선악에도 관계없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최근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그들의 죽음은 신의 분노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이 악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튀르키예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저주스러운 지진이다. 하지만 진실은 땅속의 압력으로 지각의 판이 서로 강하게 충돌했고 그 압력만큼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미 일어난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함께 합심해 재난을 대비하는 지혜를 갖춘다면 다가오는 재해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 형제의 나라로 서로 우의를 나누었던 튀르키예가 하루빨리 슬픔을 딛고 원상 복구되기를 기원한다.

이처럼 거대 자연의 현상들은 의도와 목적없이 조건만 되면 그냥 일어난다. `순수함`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긍정적인 용어이지만 현상의 발생이라는 자연과학 분야로 오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현상은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지만 일어나는 현상은 정확하며 의도없이 순수하게 일어난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깨달음을 다른 말로 견성(見性)했다고 말한다. `성품을 보았다`는 것은 성(性)이라는 존재의 본질 또는 가장 기본이고 근원적인 요소를 알았다는 뜻이다. 남녀의 성(性)이 아닌 현상의 본질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것을 말한다. 깨달음은 타인이 아닌 자기 경험의 문제이며 존재와 현상에 대한 올바른 앎이다.

컴퓨터가 인간보다 지식은 많이 알 수 있지만 인간처럼 생명을 가진 유기체가 아니다. 때문에 인간의 감정과 같은 생명현상은 결코 체험할 수 없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 이치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선 실천을 동반해야 하므로 노력 또한 요구된다. 그래서 안목을 갖춘 스승으로부터 배워야만 하고 때때로 절차탁마할 도반이 필요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