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5:28 (목)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이광수
  • 승인 2023.02.12 2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춘추방담이광수   소설가
춘추방담이광수 소설가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초가을 해살이 내리쬐는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오색영롱한 깃털의 작은 새의 시체가 눈에 띄었을 때/ 대체로 가을철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이를테면 잿빛 밤 소중한 사랑하는 이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져 갈 때/그리고 나면 몇 주일이고 당신은 다시 홀로 있게 되리라`로 시작되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안톤 슈낙의 서정수필이다. 그는 신문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하다 1,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1945년 종전과 함께 미군의 포로가 된 후 풀려나 독일 마인강변에 있는 칼시로 돌아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한다. 그는 `욕망의 장`을 비롯한 몇 권의 시집과 `우울한 프란츠` 같은 장편소설도 발표했다. 그가 대작가로 명성을 얻은 것은 산문집 `젊은 날의 전설`과 `밤의 대화` 출간 이후이다. 국내에 번역된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젊은 날의 전설`과 `밤의 대화`에서 발췌한 작품들로 그중 한 편의 수필 제목을 책의 타이틀로 삼았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반향이 대단했다. 이후 이런 종류의 서정수필집이 많이 출판되었다.

최근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수필집을 발견하고 옛 생각이 나서 한 권 샀다. 지난 2019년에 출간된 책으로 표지도 예쁘게 단장해 애장서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세월 탓인지 나이 탓인지 60년 전에 느꼈던 감흥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세상사가 복잡다단해지고 희로애락의 스케일이 커져서인지 평범한 감정으로 그 시절을 잠시 회상했을 뿐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IT를 기반으로 AI가 주도하는 지식정보사회로 급변한 시대라 격세지감이 든다. 순수가 사라진 편집된 가면의 시대를 사는 자의 비애라 생각한다.

안톤 슈낙이 묘사했던 `우리를 슬프게 한 것들`을 요약해 본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작은 새의 시체, 가을날의 비 내리는 잿빛 밤 풍경, 사랑하는 이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져 갈 때,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고궁, 숱한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발견된 죽은 아버지의 편지 한통,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갇힌 표범의 성난 모습, 성공한 친구가 나를 몰라주는 표정을 지을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슬픈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마저 외면한 채 어두운 방구석에 병들어 누운 신세, 정육점의 핏기어린 시뻘겋게 도륙된 살코기의 모습,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받지 못했을 때, 학창 시절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벌선 때, 낯선 시골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의 모습, 양로원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의 거들먹거림, 만월의 밤 개짓는 소리, 죄수의 창백한 얼굴, 사무실에서 먼지 낀 서류를 정리하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 등 안톤 슈낙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묘사한 내용들은 서정적이지만 지금 우리들에겐 그렇게 슬픈 모습들이 아닌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진다.

1세기도 안 된 짧은 기간에 급변한 우리의 일상은 안톤 슈낙이 그린 모습들과는 비교 불가다. 물론 그가 1, 2차 대전에도 종군해서 수천만 명의 세계인들이 광기 어린 독재자에 의해 살상된 비극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감정의 비틀림을 묘사해 위안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문명화된 개명 천지임에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은 계속되고 있다. 무고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탱크와 미사일을 쏘아대며 무차별 살상하는 독재자들, 신성을 핑계 삼아 이교도를 탄압하고 여성의 자유를 속박하는 광신주의자들, 사이비 종교로 인간의 맑은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덕 교주들, 백주 대낮에 불특정 다수인에게 총질을 해대는 정신병자들, 부모자식 간에 패륜이 판치는 막가는 세상, 자식이 있어도 독거노인이 죽은 지 몇 달 후에 백골로 발견되는 인륜막장의 시대, 낳기만 하고 양육하지도 않은 여자가 죽은 자식의 보상금을 타겠다고 나대는 인면수심의 모정,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회피한 채 변명만 늘어놓는 후안무치한 리더들, 권력에 취해 페르소나의 사탕발림 프로파간다로 사자후를 토하는 사이비 정치꾼들, 순진한 사람들을 교모하게 속여 등쳐 먹는 보이스 피싱 지능범죄자들, 수백 채의 아파트와 원룸의 갭 투자로 세입자들을 피눈물 나게 하는 부동산 사기꾼들, 사법정의의 수호자임을 망각한 채 권력에 아부하는 법꾸라지들, 남의 글로 사자 행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문사들, 결혼은 선택이요 이혼은 자유라며 기세등등한 프리마돈나,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스토킹 범죄자 등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만약 안톤 슈낙이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묘사할지 무척 궁금하다. 점입가경이라 글쓰기를 아예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