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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ㆍ안재홍ㆍ문일평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ㆍ안재홍ㆍ문일평
  • 이헌동
  • 승인 2023.02.0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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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의 정신을 `조선 얼`이라고 표현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 학문으로서 실학을 연구했다.

그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 전통을 잇는 것으로 엄밀한 사료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햇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교수가 되어 한문학ㆍ국사학ㆍ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했다. 우리나라 국학의 최고봉으로 국학연구와 교육에 매진했으나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했다.

광복이 되자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로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해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단절된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지난 1948년 대통령 이승만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고 국학연구에 몰두하다가 6.25 때 납북됐다.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민족주의 사학의 맥이 대학강단에서도 이어지고 국학연구가 확산했을 것이다.

안재홍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비교언어학이나 유물사관을 포함한 사회과학적 해석을 수용해 민족주의사학을 역사과학적 차원으로 높이려고 했다. 민족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밀하게 연구 개발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時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과 사장을 역임하면서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했다.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8개월 동안 투옥됐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됐다.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했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 나 2년 동안 복역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1937년부터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다.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이 1946년 3월 7일 미군정 교육심의회 제4차 전체 회의에서 채택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군정 군정장관과 국회의원 등을 하다 6ㆍ25 때 납북됐다.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민족주의 사학의 맥이 대학강단에서도 이어지고 홍익인간 교육이 강화됐을 것이다.

문일평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의 정신을 `조선심`(朝鮮心)이라고 하면서 한국사 해석에 문화와 민중적인 요소를 가미햇다. 이렇게 연구한 것을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알기쉽게 설명함으로써 민족주의사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역사 연구의 최종 결집으로 일원적 정신으로 제시한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을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심`의 결정(結晶)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됐다고 했다.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자아(自我)의 재검토ㆍ재수립으로 보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했다. 사실(史實)을 흥미롭게 재구성해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誇大)와 부회(附會), 독단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말엽 많은 지도자들이 변절해 일제에 협조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작금의 국민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한다.

이런 관점은 식민교육이 극복되지 못하고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교육으로 이어진 가치관의 오도에서 생긴 인식의 오류다.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모두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거나 시골로 은거해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고 일부는 투옥되어 있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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