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4:05 (목)
나라 밖을 내다보자 43
나라 밖을 내다보자 43
  • 박정기
  • 승인 2023.02.06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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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선조가 조선의 왕이었던 것은 조선의 불행이었다. 한심한 선조는 그렇다 치고, 정승 판서들은 무얼 했는가. 김성일 어른은 그게 무슨 말씀인가. 그 훌륭한 어른이! 나라의 존망이 달린 때에 자기 당파 때문에 거짓 보고를 해? 지식인의 충(忠)이 크게 잘못되었다. 500년 사직(社稷)이 아니라 백성이어야지. 지금도 헷갈리는 지식인이 너무 많다.

일본의 선봉 고니시 유카나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이 1592년 4월 15일 오후다. 부산진과 동래부를 차례로 점령하고, 상주를 거쳐 18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무인지경을 진격하는 격이었다. 조선에는 군사도 없고,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되었다.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이것은 국왕의 책임이기 전에 현령, 절도사, 판서들의 책임이다. 관리자들이 문제의식이 없고, 눈을 감고 있으니 나라가 관리될 턱이 없다.

그럼 18세기에는 어땠나? `해유록(海遊錄)`이란 책이 있다. 1719년 조선통신사 기록 담당관(擔當官)으로 간 신유한(1681~1752)의 일본 기록이다. 왜를 싫어하는 조선 선비의 기록이라 객관성이 있다. 그는 일본 사회를 병농공상의 계급사회로 보았다.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있다고 썼다. 예컨대 조선통신사 행차를 구경 나온 민중들의 질서가 정연한데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식자(識者)들과 필담(筆談)을 했을 때 그들의 지식과 기언미담에 놀란다. 주점의 음식이 깨끗하고 환경이 청결한 점을 주목하였다. 여자들이 개방적이고, 외국인한테도 손을 흔들고, 웃고 말하는 게 낭랑하다고 하였다. 출판도 성행하여 책이 흔하고 민중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였다. 실제로 에도 막부시대 일본의 발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직업 외교관으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한 신상목이란 사람이 쓴 책에 의하면 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이미 16세기에 역전되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의 에도시대가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에 맞먹는 전환의 시대라고 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수도인 에도를 권력의 중심지답게 하려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운하와 도로를 정비하고, 해자(垓子) 공사와 축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당시 서구의 어떤 도시 못지않은 인프라를 완비했다. 특히 40여㎞ 이상 떨어진 다마가와의 물을 에도까지 끌고 와 상수도로 만들어 음료수로 사용토록 했다. 이는 공사 규모도 규모지만, 물을 그 멀리서 자연히 흐르게 하는 고도의 토목기술 문제도 해결했다는 말이다.

막부는 지방 제후들을 견제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참근교대(산킨코타이)제이다. 이는 지방 제후들이 격년으로 일 년씩 에도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말이 근무지 본래 목적은 제후를 인질로 잡아 두기 위한 제도다. 제후국은 크기에 따라 적게는 100명으로부터 많게는 700~2000명의 인원이 제후와 함께 움직였다.

전국의 제후는 북으로는 아키타 영주로부터 규슈 남단의 사쓰마번까지, 중요 다이묘만 30여 명이다. 예컨대 62만석의 대제후국 사쓰마번의 경우 수행원이 약 1900명, 에도까지 약 1650km를 두 달 넘게 걸려 2년마다 한 번씩 수도를 왕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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