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6:25 (화)
나라를 구하는 민족주의사학
나라를 구하는 민족주의사학
  • 이헌동
  • 승인 2023.02.02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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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해방 전 역사학은 독립운동과 함께 역사를 연구한 민족주의사학이 있었다. 또, 백남운ㆍ김석형ㆍ박시형 등이 사회경제사학의 관점에서 역사연구를 했다. 그리고 식민사관으로 역사를 연구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으로 이병도와 신석호 등이 있다.

사회경제사학자들은 해방후 북한으로 가서 북한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남한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독립운동 과정에 순국하거나 6ㆍ25 전쟁 시 납북됐다.

그래서 강단사학은 식민사학자 이병도ㆍ신석호에 의해 장악되었다. 식민사학의 요체는 단군말살과 단군신화, 낙랑군 평양설, 임나일본부설, 등인데 남한의 강단사학은 이를 이어받아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교육을 했다. 북한의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을 척결, 식민사관의 요체를 극복했다.

남한의 식민사학 유풍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학자들과 국민들이 민족주의사학 전통을 바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역사연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식민사관의 요체를 극복하고 희망의 역사교육을 하자고 주장한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역사를 세워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역사학이 민족주의사학이다.

김교헌ㆍ박은식ㆍ이상룡ㆍ신채호ㆍ정인보ㆍ문일평ㆍ안재홍ㆍ김승학ㆍ손진태ㆍ홍이섭 등이 구국(求國)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했다.

4회에 걸쳐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민족주의사학을 배척하고 왜곡하는 식민사학 후계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해 민족주의사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지금의 국가 위기도 민족주의사학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뜻을 따르면 극복되기에 상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김교헌은 유일한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의 관장인 대사성을 역임했고 최고의 지식인이 주로 맡았던 규장각 부제학도 역임했다.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화해 민족 주체 사관을 정립하였다. 그가 저술한 `신단민사` 등은 단군조선을 역사화 할 수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김교헌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 1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공부 발견이 제일 많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다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이 세운 공보다 더 큰 것이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임시의정원이 위임통치안을 제시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했다. 박은식이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어 이상룡을 임명하였다. 박은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한민족의 정신을 `민족혼`이라고 불렀다. 민족혼을 보존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국권회복의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 대해 쓴 `한국통사`나 일제에 맞선 한민족의 투쟁을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펴낸 책이다.

이상룡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대동역사`라는 역사서를 만들어 무관학교 교재로 삼았다. 무관학교 출신들이 청산리 전투나 의열단과 광복군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안동의 99칸 저택 임청각(독립운동가 9명 배출) 주인으로 일제의 보복으로 집 가운데로 철도가 뚫렸다. 독립운동의 대가로 후손들이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신채호는 역사 주체로서의 민족을 선명하게 부각함으로써 반식민지주의적 관점을 분명히 해 주체적인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봤다. `아`는 우리 민족이고 `비아`는 우리나라를 침탈한 외세나 그들을 도운 사람들을 뜻한다. 신채호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대한제국 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9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한 신동으로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한학으로는 당대 최고였다. 신채호는 접근 가능한 역사서를 모두 분석해서 `고사상 이두문의 명사 해석법`, `삼국사기에서 동서 양자가 서로 바뀐 것의 고증`, `평양 패수고` 등의 논문을 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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