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8:28 (수)
가야사 공부ㆍ연구에 도움 주는 책들
가야사 공부ㆍ연구에 도움 주는 책들
  • 이헌동
  • 승인 2023.01.19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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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가야사 공부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분이 있었다. 가야사에서 논란이 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로 이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였다.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것은 역사주권을 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임나일본부설을 가장 잘 극복한 책이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와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이다. 이 두 책을 읽어보면 가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알 수 있다. 또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알 수 있는데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라는 책에는 강단사학자들이 다루지 않는 분야까지 다루고 있다. 제4장에 있는 `가야 사람들의 일본열도 진출`이다. 1. 지명과 문헌을 통하여 본 가야 사람들의 진출 정착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본 가야 사람들의 진출 정착지, 가야토기의 분포, 기타 유물의 분포 2. 가야계통 소국의 형성 ①이토시마 가야(가라)소국: 이토시마반도에 전개된 가야계통 지명, 이토시마반도에 축조된 조선식 산성, 광개토왕릉비와 유적유물을 통하여 본 이토시마 가야소국 ②기비 가야소국 3. 임나일본부의 정체 ①임나일본부란 무엇인가: 웅략기 임나관계 기사 고증, 계체기 임나관계 기사 고증, 흠명기 임나관계 기사 고증,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인물 고증 ②임나일본부설 조작의 역사적 경위 ③임나일본부의 위치

<삼국사기>를 읽으면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실성왕은 임금이 되던 해(402년)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고구려가 아닌 왜나라로 보냈을까?, 실성왕 12년(413년) `평양주(平壤州)에 큰다리를 새로 만들었다`는 기사의 평양주는 어디일까?, 실성왕 14년(415년)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기사의 풍도는 어디일까?, 눌지왕 2년(418년) `박제상이 왕자 미사흔을 왜에서 몰래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순국하였다.`에서 이 왜는 어디에 있던 왜일까? 일본학자들과 국내의 강단사학자들은 야마토왜라고 한다. 야마토의 왜(일본의 나라지역)에서 그 먼 길을 추적을 피하고 무사히 귀국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의문을 해소해 준 책이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와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였다.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지방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마토정권의 전권대표 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토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였다. 기비지방에 가야가 있었고 가야국조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본 측 기록(구사본기-국조본기)에도 있다. 임나일본부의 일본(야마토)이란 말과 부(府)라는 말은 4~6세기 당시에는 없었던 것을 8세기 <일본서기> 편찬 당시 조작해낸 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박제상전` 및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는 가야와 신라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 어떤 때는 쓰시마 섬과 이키 섬 까지도 자기의 통제권에 넣었던 북규슈 이토시마반도에 있던 가야계통 왜소국이었다. 일본학자들과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말하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기내지방의 야마토왜가 결코 아니었다. 야마토 규슈 지방까지 힘을 뻗쳐서 각 지방세력을 행정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7세기 중ㆍ후반이다. 6세기 후반에도 야마토왜는 규슈도 지배하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의 가야지역을 경영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야 사람들은 세토 내해의 중심에 위치한 기비 지방(오카야마현과 히로시마현 동부)에도 많이 진출하여 여러 개의 소국을 건설하였다. 빗쮸의 가야소국, 비젠 가라(아라)소국, 빙고 남부의 아나소국, 사누끼의 아야소국 등이다. 이 중에서 빗쮸의 가야소국이 임나였다. 6세기 중엽 빗쮸 가야소국(임나)은 약화하고 가미쯔미찌(죠도) 일대에는 가라, 아라, 도꾸 등의 작은 나라들이 형성되었다. 오꾸 지방에 있던 신라소국은 점차 강성하여 국경선인 요시이강을 넘어 임나가라땅을 침범하였다.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는 임나왕이 나오고 그의 부하들 가운데 기비노오미 오나시와 같은 기비땅의 장수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임나왕이 기비 가야왕 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또 신라 정벌 장수 기비노오미 오시로가 신라를 치러 가는 도중에 기비국에 머물러 있었다는 등 여러 기사가 기비의 신라, 기비의 가야(임나)에 가서 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임나일본부 관련 지명이 일본에 있는데 식민사학 유풍의 사학자들은 변형된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임나일본부 관련 지명을 우리나라에서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왜 그럴까?

식민사학 유풍에서 벗어나 가야사를 연구하고 교육하기 위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와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다. 국민들이 가야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본이 아닌 우리의 관점에서 가야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역사학자들과 선생들을 응원하여 식민사학 유풍에서 벗어나 역사주권을 확립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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