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조작하고 양심수 되면
거짓ㆍ진실은 상대적 의미뿐
"한 번의 거짓말은 거짓말로 남지만, 천 번의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는 말은, 나치의 악명 높은 선동가인 요제프 괴벨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 말을 정말로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치의 광기를 가져온 전체주의에 대한 좋은 요약이 되어주는 말이다. 다들 알겠지만 당시 나치와 괴벨스의 작업은 너무나 성공적이었기에, 그 후에 많은 독재자들이,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전략을 베껴서 활용했다.
그들이 주목하는 나치 시절의 경험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럴싸해 보이는 말들은 쉽게 믿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쓰디쓴 진실은 불안정한 반면, 달콤한 거짓은 위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검증이 어려운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극미할 수도 있고, 권위자의 말이 곧 진실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믿음이 모든 증거에 어긋나더라도 기꺼이 믿으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는 증거가 없으면 진실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 바로 과학과 사법의 영역이다. 그래서 과학과 사법의 영역에서 인정받은 사실은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영역과는 달리 세상에 보편적으로 적용이 되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컨먼센스이지만, 지금도 괴벨스의 성과를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자들은 수많은 증거로 증명된 객관적인 진실을 이데올로기에 기댄 몇 마디의 거짓말로 이겨내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심복역할에 너무 만족해서인지 인터넷 필명을 바둑이로 쓰던 김경수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었던 시절 댓글조작 사건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괴벨스의 말을 아마도 수백 번은 머리에 되뇌었을 것이다. 아마도 댓글 사건이 정치 영역에서 논란으로 머물렀다면 괴벨스의 말은 또 한 번 현실에서 유효성을 입증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불행히도 사건이 "오직 증거만이 말을 한다"는 것을 유일한 금과옥조로 삼는 매우 발전된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가 꼼짝없이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죄의 증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사회권력까지 모두 장악한 데다가, 더군다나 이념적 편향이 심한 김명수가 대법원장이었음에도 차고 넘치는 죄의 증거는 도저히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법률가로서 볼 때 그렇게 유죄 증거가 많은 사건을 거의 4년을 끌면서 도지사 임기를 거의 다 채웠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김경수는 지난 4년간 권력이 진실을 덮을 것이라는 한 올의 희망을 걸고 거짓말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죄가 없다는 거짓말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왜 죄가 없는지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못했다. 괴벨스의 교훈대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추상적인 그럴싸한 단어만 적절히 선별하여 구사하였다. 진실, 인내, 시련, 가시밭길 이런 단어들 말이다. 하지만 김경수는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 사용하는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간 자가당착적 언행이다. 게다가 최근 사면 논란 관련하여 발표한 입장문을 보면, 이제는 본인을 스스로 양심수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이제는 김경수가 인식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거짓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사실을 말한다고 믿는 공상적 허언증, 소위 "리플리 증후군" 단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기세라면, 출소 후에는 민주화 투사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처럼 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 정도 되면 그 수준의 증상을 정의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될 것도 같다. 사실과 증거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범죄자일 뿐인데,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가면 민주화 투사가 되니, 이 마법 같은 조화를 누가 거부할 수 있겠나.
그런데 진실을 피해서 이데올로기에 숨기를 택한 사람은 또 있다. 이 혹한의 날씨에, 굳이 제일 추운 경기도와 강원도를 돌면서 황당한 독재투쟁을 시작한 바로 `그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