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3:14 (금)
삼별초(三別抄)와 오키나와
삼별초(三別抄)와 오키나와
  • 김제홍
  • 승인 2022.12.2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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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류큐국(琉球國)은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현 일대에 위치한 독립 왕국이었다. 14세기 초기, 이 지역에 3개의 왕국이 형성되는데, 위치에 따라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이라고 불렀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했고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제법 번성하였다. 16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일본 상인들이 류큐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시작하고, 명나라가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완화하며, 서양 상인들이 아시아 각국에서 직접 무역을 하게 되니 류큐의 중개무역이 쇠락했다. 

일본 에도 시대의 사쓰마번(薩摩藩)은 오키나와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지역에 속해 있었다.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은 류큐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며 17세기 내내 괴롭혔고,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현을 설치(1879년)함으로써 450년 지속된 류큐 왕국은 멸망하였다. 

류큐는 대몽항쟁으로 유명한 삼별초(1270~1273)와 인연이 깊다. 삼별초는 1273년 4월 제주도 항쟁이후 역사에서 사라진다. 당시 1300여 명이 포로가 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271년 5월 진도 용장성을 함락하고 잡힌 포로 1만여 명이었는데, 제주도 항파두리 토성이 함락될 때 잡힌 포로는 너무 적다.

제주도 삼별초군 일부가 류큐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이름의 기와는 류큐왕국 성립 직전에 고려인이 건너가 제작한 것이다. 이 기와가 많이 출토된 슈리성은 삼별초가 세운 성으로 추측된다. 당시 그곳은 왕국이 생기기 전이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기와의 `계유년`이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이라고 본다. `고려사`에서 처음으로 고려와 류큐 간의 교섭 기록이 등장(1389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389년이라면 고려 장인이 원나라나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아도 류큐는 우리와 가까웠다.

일본에 핍박받기만 하던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장이 된다. 

미드웨이해전 승리 이후 미해군의 계획은, 마리아나 제도 → 대만 → 중국 → 만주 → 조선 → 부산을 통해 일본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남방의 자원을 노리고 계속 남진하자 대만점령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해군의 니미츠 사령관은 육군의 맥아더를 견제하기 위해 오키나와 점령을 주장했다. 당시 미국정부는 동경 159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육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동쪽은 해군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발판으로 한 일본 본토작전에 대해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일전 단일 총사령관이 될 확률이 높았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토 중부 서해안에 상륙할 때, 미군 함대는 약 1500척, 지상 전투부대 18만 명, 해군부대와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55만 명에 달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약 10만 명이었고 가미카제 특공대도 투입됐다. 80여 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공식집계로 본 미군 측 사망자는 1만 2520명, 일본 측 사망자는 18만 8136명이다. 오키나와 주민들 중 상당수는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쓰고, 나중에는 `살아서 치욕을 당하지 말라`며 자살까지 강요했다. 

우리와 가까웠던 류큐는 그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남겼고, 그 후손들은 일본 말로 일본 역사를 배우고 있다. 카(E. 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unending dialogue)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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