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6:45 (금)
존재의 본질 ④ 존재의 법칙은 드러나 있다
존재의 본질 ④ 존재의 법칙은 드러나 있다
  • 도명스님
  • 승인 2022.12.12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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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br>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경남 함양 백운산 팔부 능선에 화과원(華果院) 유허지(遺墟址)가 있다. 화과원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불가의 큰 스승이셨던 백용성 스님께서 수십 명의 선승들과 농사를 지으며 수행을 겸했던 농선(農禪) 도량이다. 스님은 여기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판 자금으로 비밀스럽게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러한 사연은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선생께서 임시정부가 어려운 시절 화과원에서 보내준 자금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밝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광복 후 화과원은 본래의 터전은 사라지고 토지는 유실되어 그 존재가 거의 잊혀졌다. 이후 용성 큰스님의 손자 상좌인 제월당 혜원스님께서 원을 세워 수십 년에 걸친 노력으로 토지를 되찾고 법당을 새로 지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스님께서는 또한 미얀마의 승정 우 위자난다 스님과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 12과를 모셔와 사리탑을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 세상과 인연이 다해 재작년에 입적하셨다. 스님의 열반 후 필자의 사형님이 주지로 부임하셨는데 선사(先師)의 뜻을 이어 드디어 지난달에 사리탑 제막식을 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사형제들끼리 차 한잔 나누는 대화 속에 그 옛날 화과원을 주제로 용성 큰스님과 고봉 스님 사이에 주고받았던 문답의 내용이 소환되었다.

때는 춘삼월, 화과원에는 사과, 배, 복숭아 등의 온갖 과일나무들이 꽃을 피웠다. 당시 젊은 구도자 고봉 스님은 화과원에 가서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수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용성 스님과 화과원을 산책했는데 큰스님께서 문득 고봉스님의 수행을 점검하기 위해 "한마디 일러보라" 하셨다. 갑작스러운 스승의 물음에 고봉스님은 "화과원리도화발(華果院裏桃花發)" 즉 "화과원에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용성 스님은 즉시에 "틀렸다, 그런 삿된 소견으로는 마구니(악마)를 면치 못한다"라며 짐짓 꾸중을 하셨다. 스승의 질타에 주눅이 든 제자는 "그럼 스님께서 한마디 일러 주십시오" 말했고 용성스님은 미소를 머금고는 고봉스님과 똑같이 "화과원리도화발"이라고 답했다. 같은 대답이지만 안목과 확신의 차이로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려버렸다. 

선문(禪門)에서 흔히 "도가 무엇입니까?"로 물을 때 "해는 서쪽으로 지고 달은 동쪽에서 뜬다", "작년 겨울의 추위를 올해도 바꾸지 않았다"는 식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현상을 가감 없이 단순하게 말한다. 존재의 본질을 깨달은 현자들은 `지금 여기`라는 순간과 이곳이라는 공간 속에 이미 완벽한 자연의 법칙 드러나 있음을 언어를 통해 묘사했던 것이다. 봄에 과수원에 꽃이 활짝 피거나,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 그리고 겨울 추위가 여전한 것은 범부의 눈에는 별스럽지 않은 평범한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인의 눈에는 평범과 비범의 차이가 따로 있지 않고 모든 현상은 인연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진리의 모습으로 비친다. 이처럼 존재의 실상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다. 

존재의 근원,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이론은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과 생명 현상은 `인연이 되면 생겨나고, 인연 따라 변하며,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법칙을 따른다. 이러한 유구한 우주의 법칙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있었고 현자들이 깨닫기 전에도 있었다. 

진리는 항상 가까이 있다. 하지만 마음은 `지금 여기`를 떠나 생각으로 지은 가공의 이상향을 쫓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주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의 마음은 벌써 안드로메다 저쪽 드넓은 우주 공간으로 나아가기 일쑤이다. 그러나 정작 우주는 내가 서 있는 공간부터 시작된다. 또한 태평양의 위치를 물으면 하와이 인근의 바다를 상상하기 쉽지만 여기서 보면 부산 앞바다부터 태평양이다.

생각이 만든 고정관념은 종종 눈앞의 본질을 놓치게 한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발달시킨 생각이란 도구는 시간이 걸리고 비용과 노력이 드는 것을 가치롭게 여기는 것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보다는 특별함을, 평범보다는 비범함에 의미를 부여해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가치 있는 것은 시간과 비용, 심지어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이가 기본적으로 이미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 그냥 볼 수 있고, 소리가 나면 저절로 들리며, 얼음을 만지면 차고 난로 옆에서는 따뜻함을 느끼는 천연의 기능들이다. 천기(天氣)는 누설(漏泄)되어 있고 수행이라 해도 요란할 것이 없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살피고 그 가치를 다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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