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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을 내다보자 35
나라 밖을 내다보자 35
  • 박정기
  • 승인 2022.12.12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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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머리맡에 둔 자치통감
1300년 왕후ㆍ장상 기록 탐독
전국시대 역사상 최악 혼란기
수백만 국민 죽고 내일 예측 불가
이 시기 공자ㆍ노자 등장 아이러니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전설 같은 대장정은 사실이 되었고, 누더기를 입은 주인공들은 영웅이 되었다. 미국의 조야에서도 마오쩌둥을 좋게 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 인물로 간주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전후 아시아 경영을 위한 큰 그림에 영향을 준 것이다.

1945년 12월 20일,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마셜 장군을 특사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하였고, 마셜은 이때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미국의 대표적인 전략가 마셜과 모략가 마오쩌둥의 첫 만남이다. "나는 마오쩌둥과 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어떤 불만도 없었고, 최선을 다해 우리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셜의 보고서다.

마셜까지도 이런 보고서를 쓰다니. 마오쩌둥의 화술과 술수에 마셜 정도의 인물도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5억 달러로 장제스를 달래가면서까지 공격을 중지시키고 마오쩌둥을 살려준 것이다. 사실 이때 홍군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장제스의 결정적인 일격을 놔두기만 했어도 마오쩌둥이 끝장이 나는 상황이었다.

한편, 미국의 스틸웰(Joseph Stilwell) 소장은 버마 전선에서 싸우다 1943년부터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일한 사람이다. 불행히도 장제스는 스틸웰 장군과 사이가 안 좋았다. 처음엔 전술 문제로 의견이 갈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적 갈등을 발전했다.

스틸웰은 미 육군이 알아주는 인물, 그와의 불화는 결국 장제스의 신뢰를 그만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교롭게도 장제스는 만나는 미국 관리마다 잘못 사귀었다. 반면 마오쩌둥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인상을 주었다. 장제스는 경서를 애독했고, 마오쩌둥은 사서를 탐독했다.

인생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랐다. 장제스는 곧이곧대로인데, 마오쩌둥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편을 만들었다.

종국에는 키신저(Henry A. Kissinger)의 마음까지 샀다. 
마오쩌둥이 머리맡에 두고 읽은 책이 `자치통감`이다. 이 책은 북송의 사마광이 지은 것으로 주의 위열왕(BC 403)부터 후주 세종(459)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300년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역대 제왕과 장상들의 치국, 처세, 인간관계를 생동감 있게그린 책이다. 사람의 한평생 경험도 값진 것인데, 1300년 동안의 왕후, 장상들이 싸우고 고민한 기록은 더 말할 게 없지 않은가.

마오쩌둥의 내공의 깊이를 알 만하다.
결국 장제스는 무릎을 꿇었다. 역사적 사건은 사정없는 인과응보의 결과다. 그는 앞서 보았던 여러 가지 원인, 인연과 사정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침몰은 장제스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난 게 아니라, 수천만 민초가 고통을 받고, 훗날 국제정치, 특히 우리 한반도와 아시아 전체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장제스의 몰락은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못 받은 데 있다.

왜 못 받았나? 그걸 우린 따져 봐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깊이 연구할 대목이다.
1946년 하얼빈에서 기사회생한 홍군은 47년부터 전략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48년 초에 만주의 99%와 허베이성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1948년 10월, 진저우 함락에 이어, 창춘을 수비하던 국민당 제60군(사령관 정동궈)이 반란까지 일으켜 만주 전역과 함께 약 70만의 정예 병력을 잃었다. 11월엔 만주의 최후거점 선양까지 홍군이 접수한다.

1949년, 베이징(1.31), 국민당의 수도 난징(4.23)이 함락되고, 5월 27일에는 중국 최대도시 상하이까지 홍군 손에 들어갔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8년 동안 끌어온 두 영웅의 천하쟁패가 막을 내렸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우리를 언제나 숙연하게 만든다.

라. 중국인은 위대했다
(1)천지인
아주 옛날, BC 5000년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물을 찾아 강을 찾아왔다. 황토물이 도도히 흐른다. 황허다. 보기완 달리 고기도 살고큰 조개도 산다.

이들은 황허 종류와 하류 일대에서 촌락을 이루어 동굴에서 살다가 집도 짓고, 흑도도 만들어 훗날 중원 룽산문화(BC3000~1800)와산둥 룽산문화를 이룬다. 소위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허 문명이다.

BC 2100년경 이들은 하나라를 세우고, BC 1600년경 은나라를 세운다. 하나라는 기록에만 있을 뿐 고고학적으로 증명은 안 된 나라다.

반면 은나라는 20세기 초에 허난성 안양시에 은허가 발견되면서 당시의 사회상과 찬란한 문화가 알려져 일약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발견된 대량의 청동기 제기와 갑골문은 그 옛날의 고도한 문명을 알려 준 경이 그 자체였다. 은의 청동기 기술은 정교한 제기뿐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무엇보다 우수한 청동기 무기를 만들어 석기를 쓰는 강족을 완전히 제압, 끝내 멀리 양쯔강 상류 고원지대로 추방하였다.
갑골문자는 거북의 껍질 또는 소 어깨뼈의 이면에 새겨진 고대 문자다. 은나라 사람들은 뼈나 갑골에 일정한 홈을 만들고, 이 부분을 달구어진 나무나 금속으로 태워 표면에 금이 생겨나게 했다. 그리고 갈라진 금의 모양을 주술사가 읽고 길흉을 판단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동물의 뼈 위에 생긴 금의 모양을 매우 신성시하고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다. 이번 전투는 우리가 이기는가, 올 농사는 풍년인가 흉년인가 등 모든 일의 길흉을 점쳐서 정하였다. 이렇듯, 고대인은 하늘을 믿었다.

BC 1000년, 마침내 은나라가 망하고 봉건제 국가인 주나라가 약 800년의 중국 역사상 최장 왕조를 유지하다가 BC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수명을 다한다. 주는 서주와 동주로 나뉘는데, 대게 BC 1000년부터 BC 403년까지를 서주, BC 403년부터 BC 221년까지를 도우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중요한 춘추전국시대를 둘로 나누어, BC 770~BC403년이 춘추시대, 전국시대는 BC 403~BC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이다.

왜 이렇게 장황한 옛날얘기를 하는가.
기원전 BC 5세기 전후한 시기에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는 춘추시대가 끝나는 시기와 전국시대가 시작하는 시기가 맞물리는 때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인류의 수수께끼라 불리는 대단한 일이 일어난다.

바로 공자와 노자, 그리고 묵자가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도에 석가모니와 우파니샤드, 그리스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스라엘에 예레미야, 이사야 같은 위인이 등장한다.

그러면 공자나 노자가 하필이면 이 시기에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기원전 약 550년 동안(BC 771~BC 221) 계속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는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BC 403~BC 221)는 역사상 최악의 혼란기였다. 200년 가까이 계속된 전화로 수백만 민초들이 죽어 나갔고, 제후나 귀족들도 내일을 점칠 수 없는 암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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