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3:51 (금)
나라 밖을 내다보자 33
나라 밖을 내다보자 33
  • 박정기
  • 승인 2022.12.01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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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br>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실제로 중국의 장제스는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일본의 80만 명의 육군병력을 중국에 4년 동안이나 묶어 놓았다. 우방 동맹국들이 장제스에게 이만저만덕을 본 게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치른 대가는 혹독하였다. 중국인 2000만 명이 희생되고, 8000만 명의난민이 고향을 잃고, 국가 기반시설의 80%가 파괴되었다. 큰 도시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장제스가 일본과 싸우는 동안 농민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다져갔다. 과감한 사회개혁 정책으로 중국인들의 인심을 사로잡았다. 

엄정한 홍군의 군기는 장제스 군의 문란한 군기와 좋은 대조를 이루어 혁명의 근거지는 날로 커졌다.

사소한 일 같지만, 홍군은 상해를 점령했을 때 민폐를 피하고자 길거리에서 잠을 잤다. 반면 국민당 군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면 으레 좋은 집을 접수하고 재산까지도 약탈하였다.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전쟁엔 이기고 나라는 공산당에 빼앗긴 셈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지역에서 연이은 참패를 거듭했다. 종일전쟁도 7년째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패색도 완연해졌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 실패를 중국에서 만회나 하려는 듯 1944년 3월, 미얀마-원난으로 연결되는 원장(중국군을 돕는 보급로) 루트를 봉쇄하겠다고 임팔(imphsl) 작전을 시작하였다. 대령 때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던 무타구치렌야란 군단장이 둔 무리수다.

이 작전에서 병사들만 4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전후에도 두고두고 욕을 먹은 대표적 실패 작전의 하나다. 44년 4월엔 북부 점령지역과 남쪽의 하이난섬을 잇는 `이치고 작전`을 폈고, 초기에는 잠깐 성과를 거두다가 주저앉는다. 기울어진 판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원자탄을 두 발이나 얻어맞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한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대륙의 천하제패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946년, 국민당 군은 공산당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2차 국공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민당은 1947년 초만 해도 잘 나갔다. 47년 3월에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수도 옌안도 점령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하는 우를 범한다. 국민당 군의 부정부패는 여전하였고 인플레로 경제까지 붕괴하여 민심이반은 가속화되었다. 1945년, 홍군의 병력은 약 120만, 국민당 군은 430만으로 무력은 여전히 국민당 군이 월등히 우세하였다.

민심의 이반에도 장제스 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대부분의 중국 대륙을 평정하였다. 지금까지는 운이 잘 따라 주었다.

이제 남은 곳은 동북의 만주 땅. 홍군은 린뱌오의 둥베이 인민해방군만이 건재한 셈이다. 1946년 늦은 봄, 장제스 군은 마지막으로 동북지방 하얼빈에 집결한 린뱌오 군에 대해 총공격을 시작했다. 그대로 둔다면 홍군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야말로 `쿠더그라스(coup de grece, 최후의 일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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