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8:57 (토)
존재의 본질 ① 어떻게 찾을 것인가?
존재의 본질 ① 어떻게 찾을 것인가?
  • 도명스님
  • 승인 2022.11.21 2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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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br>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요즘 언론에서 세계의 현 상황을 일러 신냉전 시대라는 말을 한다.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미국, 영국을 위시한 민주주의와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 사이에서 과거의 냉전 시대와 같은 긴장이 다시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문명 교류의 측면으로 보면 인류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를 넘어 서로 긴밀히 소통하며 가까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도 한몫을 하지만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의 SNS를 통한 정보 교류가 더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제한적인 교통, 통신으로 인해 지역의 범주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세계의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으며, 그 어느 때 보다 일반인들도 전문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중동의 이슬람교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장해 가는 추세이며, 불교의 명상 기법이 각종 업무와 스트레스에 지친 세계인들에게 심신 안정과 함께 영적 성장을 위한 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실, 불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도 명상의 기법과 내용은 다르지만 이미 그 요소를 일부 내포하고 있다. 

종교의 큰 줄기는 두 가지이다. 명상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는 깨달음의 길과 자기를 던진 기도를 통해 절대자의 은총을 받는 구원의 길이 있다. 그러나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듯이 인생의 한계 상황과 고통이 없으면 고귀한 수행인 명상과 기도가 필요할 리 만무하다. 범부가 없으면 성자가 필요 없고 무지가 없으면 지혜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 이래 인류에게 지금처럼 복잡한 시대가 없었으며 이전에 없던 수많은 문제들과 고통이 발생하고 있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인류는 초고도의 기술 문명이라는 이전 세대들이 겪어보지 못한 급변하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전에 없던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점도 많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상과 사회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현실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마음의 중심을 놓치고 여유를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어지러운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치료 약이 바로 명상이다. 과거 세계의 4대 성인들도 개인의 존재로부터 세상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였고 그들이 깨달은 진리의 액기스를 당대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성자들의 가르침이라는 명약을 먹고 고통을 벗어나 영육의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원래의 가르침이 유실되기도 하고, 때론 미혹한 후학들에 의해 많은 변형을 가져와 성자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희석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꼭 맞는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는 용수 때문에 망쳤고 기독교는 사도 바울 때문에 망쳤다`는 말이 있다. 인도의 용수 스님은 대승불교의 중흥조이고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드는 발판을 놓은 장본인이다. 그러나 원칙에 입각한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은 이들이 교세의 확장과 시대의 흐름만을 우선하다 보니 붓다와 예수의 본질적인 가르침조차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이 지점이 후대의 종교 사상가들이 고심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일 수 없고 때와 장소에 따라 합리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최고의 명약이라도 환자의 체질과 상태를 고려해 약을 써야 하는 것처럼 진리도 시대에 맞게 설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전은 진리가 담겨있는 성인의 말씀이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는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의 변형을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자들이 처음에 사용한 살아있는 진리의 말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때가 묻고 고착화되어 간다. 이때 후학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내어놓는다. 그리하여 서로의 인연이 맞으면 새로운 언어와 개념은 정착되고 그렇지 못할 땐 자연스럽게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동안 절집에 살아오면서 언어와 관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전이 소중하지만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전의 실상(實相)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면 진짜인 본질을 눈앞에 두고도 본질을 묘사한 설명서인 경전을 진짜로 착각했던 것이다. 오래된 진리의 용어들을 어떻게 하면 지금에 맞게 새롭게 풀어내야 하는가?. 요즘 새로운 화두로 다가온다. 설사 부족하더라도 채찍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밥값이라도 할 것 같아 한번 시도해 보고자 한다. 아직 온전치 못한 외눈이지만 보이는 만큼 나누고 부족함을 절차탁마해 가면 이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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