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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소고 ③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소고 ③
  • 이광수
  • 승인 2022.11.20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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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br>
이광수 소설가

조선시대는 개인의 혈통을 우선시하는 시대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이라는 혈통의 존귀가 최고의 가치였다. 개인의 학문적 성취와 과거급제 여부, 관직의 높낮이가 양반 사대부의 자격요건이었다. 따라서 지배 엘리트로 인정받으려면 혈통(명문가), 학문(학자), 과거(대과급제), 관직(정3품 당상관 이상)이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설령 대과문과에 급제했더라도 혈통이 한미(寒微)한 사람은 국가 요직에 등용될 수 없었다. 권력 주류에서 낙오돼 승진하지 못한 지조 있는 관리들은 중도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며 후학을 양성했다. 뛰어난 자질을 갖췄음에도 대의를 펼쳐보지 못한 채 초야에 묻혀버린 인재들이 수없이 많았다. 

조선시대 급제자들은 실무능력 면에서는 뛰어나지 못한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관리들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유교경전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실사구시(實事求是)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을 20여 년 간 달달 외워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중국 명.청시대 최악의 적폐였던 팔고문(八股文:사서로만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함)으로 관리를 선발한 팔고취사제(八股取士制)와 다름없다. 해방 후인 1950년 우리나라에 고위관료 채용시험인 고등고시가 처음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이 직접적인 모태에 가깝다. 당시에는 행정과와 사법과로 구분해 실시했는데 지금의 행정직 공채와 폐지된 사법시험제도를 말한다. 당시 이 시험에 합격되면 출신지 마을에선 합격을 축하하는 동네잔치를 벌였다. 특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군수가 직접 합격자 집을 방문해 축하인사를 했다. 행정고시 합격자는 바로 군수로 임명돼 2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군수 영감`이라고 호칭했다. 그 뒤 여러 직렬로 분류되었지만 고시합격은 가문의 영광이자 벼락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몇 년 전 공무원시험광풍이 불 때 지방직 9급공채에 합격하면 가문의 영광이자 1등 신랑감 후보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70~80년대 지방9급공무원(면서기)은 길가는 개도 쳐다 보지 않는 찬밥신세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이런 고시제도의 폐해는 사법시험에서 생겨나 평생 오직 사시에만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는 소위 `고시낭인`을 낳기도 했다. 그래서 2009년 법률전문대학원(Law School)이 생겨 자격시험제도로 바뀌었으며, 2017년 사법고시는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와그너-송의 문과대과 프로젝트에서 송준호 교수는 `과거제는 세습귀족이 독점하던 정치운영권을 광범위하게 분담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인류사에 획기적인 제도였다. 유교문화권에서 과거제를 통해 지배엘리트를 공채하여 국가운영의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며 과거제도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임란ㆍ호란의 양란을 겪으면서도 전쟁이 사회의 주역이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양란 후에 각지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 족보를 만들어 내가 누구의 자손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혈통을 챙기기 시작함으로써 씨족가문의 중요성은 더 커져 존경받는 제1조건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처음 사람을 대면해 통성명을 할 때 성이 같으면 으레 본관을 묻는다. 그때 같은 본관이면 무슨 파냐고 물어 같은 파이면 가족처럼 반기며 금세 구면처럼 반가워한다. 이는 바로 우리 민족이 같은 혈통을 얼마나 중요시하는가를 알 수 있는 증거다. 비단 우리만 그렇지 않다. 흔히 서구나 미국은 조상도 잘 모르는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경우 아이비리그가 있는 동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조상얘기를 엄청 많이 하고 뿌리에 대한 자긍심이 무척 강하다. 아일랜드계 무슨 가문이니, 영국 무슨 왕조의 후손이니 하면서 조상이야기에 열을 올린다고 한다. 어딜 가나 자신의 근본인 뿌리를 찾는 일은 인지상정인 것 같다. 

이제 우리나라도 반상의 차별이 철폐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각 씨족의 족보는 살아 있고 또 앞으로 영원히 대를 이어 누적된 기록을 남기며 존재할 것이다. 필자 역시 젊을 때는 먹고 사는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내 조상과 뿌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막상 직장에서 은퇴하고 문중 일에 관심을 가지고 뿌리 찾기에 나서 보니 지난 기록들에 많은 오류가 존재함을 알았다. 남은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한때 빛났던 조상의 발자취를 찾아 족보나 역사서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일에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의 성씨관향이 4197성이지만 시조가 있는 성관은 10~20%에 불과한 것을 보면,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에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뿌리 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뭘세`라는 용비어천가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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