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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소고 ②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소고 ②
  • 이광수
  • 승인 2022.11.13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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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br>
이광수 소설가

조선시대 대과문과 최고령 합격자가 85세라면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때 14세로 합격한 이건창이었다. 14세에 합격했더라도 18세가 되어야 보직을 주었다. 최연소 장원 급제자는 선조 때 박호로 17세 소년등과에 장원급제까지 한 셈이다. 그러나 정조 이후 순조~고종까지 과거제도가 문란했던 점을 감안하면 대과문과 급제자의 질적 위상은 많이 추락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 때는 왕의 권한으로 특채시켜 주는 직부전시(直赴殿試)제도가 있었다. 대과의 초시와 복시 없이 바로 임금의 전시로 합격시켰다. 소과에서 장원했거나 성균관에 입학해 특별시험에서 1등 한 유생에게 내리는 일종의 비정기 등과제도였다. 조선조의 대과문과시험 최고경쟁률은 정조24년(1800년 3월 21일) 순조의 세자책봉을 기념해 실시한 비정기 대과시험이었다. 정시(식년시)가 아니라서 12명만 뽑았는데 응시자가 무려 21만 5417명에 이르러 과장도 세 곳으로 나눠 이틀에 걸쳐 치러졌다. 그중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자가 7만 1498명이이었는데 첫날 10명, 둘째 날 2명이 합격했으니 그 경쟁률의 치열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신 무과는 문을 중시한 조선조에서는 상대적으로 문과에 비해 하대 받는 시험이었다. 무과급제자는 50명을 뽑았는데 갑과는 종7품, 을과는 종8품, 병과는 종9품의 관직을 제수했으며 전시에서 장원을 뽑지 않았다. 그러나 문과 급제자처럼 합격자에게 홍패(합격증)를 주었다. 임진정유 양란 20전 20승의 무패 전쟁영웅인 이순신 장군도 문과가 아닌 무과에 응시해 3번 낙방한 후 4수 끝에 합격했다. 

와그너-송 교수가 문과급제자 1만 4607명을 대상으로 작성한 개개 급제자의 신상카드는 10만여 매에 이른다. 이 기초자료에 의해서 해당집안(가문)의 족보와 문집, 이조실록, 읍지 등 관련자료를 총동원해 일일이 확인작업을 진행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양반들의 혼맥, 인맥구조를 통해 권력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34년이 걸렸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이 연구에 단 한 푼의 정부지원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를 보면 조선 문과대과급제자 1만 4607명 중 200명 이상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본관)은 12씨족이었다. 전주이씨 844명, 안동권씨 358명, 파평윤씨 338명, 남양홍씨 322명, 안동김씨 309명, 청주한씨 275명, 밀양박씨 258명, 광산(광주)김씨253명, 연안이씨 243명 여흥민씨 234명 순으로, 차장섭 교수가 저술한 <조선후기 벌열연구>의 기록과는 합격자 수와 순위에 차이가 난다. 그만큼 자료조사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더욱 주목할 점은 특정 가문에서 대량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안동김씨 김극효의 후손에서 130명, 반남박씨 박소의 후손에서 129명, 대구(달성)서씨 서성의 후손에서 120명, 풍산홍씨 홍인상 후손에서 111명이나 대과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는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도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송준호 교수는 인터뷰에서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엘리트들은 민족이나 국가 개념보다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관지제(衣冠之制)로 예(禮)나 도덕, 성현지도(聖賢之道)이다. 우주운행의 이치가 있듯이 사람의 세계에 우주의 이치를 받들어 성인이 마련한 이치가 있으니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들의 행동규범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의 실체 중에서 가장 큰 특성은 관리의 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점이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치한 관리의 수가 100명에 불과하고, 서울을 제외하면 지금 남북한을 합친 조선8도를 통치한 일선관리의 숫자가 1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지금 인구 3만도 안 되는 일개 군부의 공무원 수가 650명인 것을 비교하면 상상이 안 되는 인원수이다. 당시 조선팔도의 인구수가 비록 150만 명에 불과했지만 공간적 개념으로 남북한을 합친 면적을 감안하더라도 이해 불가다. 물론 그 당시 지방관하에 향리(鄕吏)인 아전이나 이방이 있어서 지방관의 업무를 보조했다지만 한 해 평균 30여 명의 대과급제를 뽑았다는 것은 양반관료집단의 철저한 독점지배 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외형상으로는 대과응시의 관문은 반상의 구분 없이 열려 있어서 40~50%가 평민 출신이었으며, 무과, 잡과, 의과 등에 평민층이 많이 응시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대과응시의 기회는 골고루 주어졌지만 입신출세는 결국 문벌(집안, 씨족)에 크게 좌우되어 대과에 급제하고도 미관말직이나 한직, 지방관에 머무르는 급제자도 많아 특정 씨족이나 가문의 관직 과점현상이 심했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혈통이 우선했으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출신이 지배 엘리트로 인정받는 폐쇄적인 지배사회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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