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6 08:49 (화)
일송정 푸른 솔은
일송정 푸른 솔은
  • 도명스님
  • 승인 2022.11.07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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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br>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한 7, 8년 되었나 보다. 중국 연변 길림성에 사는 한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은사이신 정여 큰스님을 모시고 그곳에 갔다. 장학금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 나이 들어 출가한 원담스님이 재원의 일부분을 출연하였고, 은사 스님도 함께 기금을 쾌척하였다. 당시 또 한 분의 동행자가 있었는데 경희대에 재직하셨던 이승래 교수님이었다.

사실 이 장학사업은 이승래 교수님이 처음 시작하여 고향의 선배였던 원담스님께 인연을 지어주었던 것이었다. 우리들은 연변에 도착한 후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물론 동포들에게 좋은 일 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겠지만 알고 보니 이승래 교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그 바탕임을 알게 되었다. 장학금 전달식을 마치고는 며칠에 걸쳐 용주사를 비롯해 그 일대의 사찰과 문화유적을 둘러보게 되었다. 용주사는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참석한 용성 큰스님께서 창건하셨다는 사찰이다. 

그러다 가곡 `선구자`로 유명한 일송정을 가게 되었다. 일송정(一松亭)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군들의 근거지의 중 하나였던 용정시에서 보이는 비암산에 있는 정자다. 일송정에 올라보니 용정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송정은 굴곡의 현대사 속에 자취를 잃었는데 이 교수가 이를 다시 복원했다.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했다는 것과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사뭇 놀랐다. 정자 옆은 원래 민둥산이었는데 특별히 백두산 소나무를 옮겨와 심었다고 한다. 관리 소홀로 다섯 번이나 고사하였지만 그때마다 그는 말없이 소나무 값의 수십 배를 현지에 보냈다. 어떤 때는 얼마 전까지 멀쩡했던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현지인이 농간을 부려도 모른척하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했다. 

산을 내려와 과거 용성 큰스님이 용정에 머무시면서 나라 잃은 백성들과 그곳 불자들을 위해 창건한 용주사(龍珠寺)에 갔다. 절에 도착하니 저녁 때가 가까워졌는데 중국 스님 한 분이 여러 가지 서류들을 태우고 있었다. 내용인즉 한국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용성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중국 공산당이 탐탁지 않게 여겨 소각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조선족들이 민족을 인연하여 결집하는 것을 경계해 용주사의 폐사(廢寺)가 결정되었다는 황망한 말까지 들었다. 

당시 이 교수의 허탈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용주사를 중국 정부로부터 공인받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 그날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을 확인하는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의 순간에 그곳에 있었다.

그는 불교인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였지만 역사와 문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선 경계가 전혀 없었다. 며칠 함께하면서 그의 남다른 행보에 호기심이 발동해 물어보니 의문이 풀렸다. 사실 이러한 공심(公心) 뒤에는 그의 특별한 인생 체험이 있었다. 이 교수는 70년대 대학생 시절에 유신 반대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강제징집 당했다. 불온 세력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는 어느 날 이유 없는 심한 구타를 당하다 숨이 멈추게 되었다. 결국 사망 판정을 받고 군 영안실에서 시체들과 하루 동안 있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고 한다. 

죽음을 체험한 그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죽음은 예고가 없다는 것을 절감한 그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다시 받은 보너스 같은 생명을 세상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어린이 학습지 아이템플을 경영하며 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18년간 대표를 지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대로 남모르게 장학사업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왔다. 며칠 전 이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또 한번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필자가 가야불교와 우리 역사의 현실에 대해 말하니, 그도 역사에 대한 소회와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아닌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인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내용이었다.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중요 전투에 매번 선봉장으로 싸웠던 무의공은 전후 당파싸움의 피해로 그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 교수는 82년부터 40년 동안 무의공에 대한 자료를 찾아 발로 쫓아다녔으며 사비를 들여 학술대회를 꾸준히 개최해 왔다. 드디어 이제는 무의공의 탄생지 경기도 광명시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역의 역사 문화 콘텐츠로 개발해 시민축제를 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발굴하고 있는 의인(義人) 이승래 교수님의 숨은 노고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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