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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밖을 내다보자 28
나라밖을 내다보자 28
  • 박정기
  • 승인 2022.11.03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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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탈출 1만 2500㎞ 걸어
마오쩌둥, 장제스에 승리 계기
8만 6000명 중 7000여 명 생존
국민당ㆍ공산당 세력 싸움 지속
국민당 비리ㆍ수탈… 민심 이탈
마오쩌둥 중국 공농홍군 조직
장제스 4차례 토공전 벌였으나
마오쩌둥의 전략 매번 실패해

최대 위기를 맞은 공산군(홍군)은 포위망을 탈출, 산시성 어딘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험지를 골라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산시성을 목적지로 한 것은 지형이 험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기 용이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주력인 제1방면군 내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지도급 인사가 많았다. 저우언라이와 지도력을 양분하고 있던 마오는 소련의 압력으로 지도력을 한때 상실 하였다. 그러나 홍군이 패전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강한 적과 싸울 때는 게릴라전이 유리하다는 결론이 났다. 그리고 1935년 1월 마오쩌둥의 노선이 다시 채택되고 당 지도권도 주어졌다.

대장정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공산당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표면적으로는 대장정이란 장제스 군의 포위 공격에 공산군이 패주한 사건이다.

8만 6000명의 제1방면군이 368일 동안 1만 2500㎞를 걸어서 이동한 고난의 역사다. 바로 고난의 역사에 뜻이 있다. 강한 쇠는 담금질을 잘해야 강해진다. 인간도, 조직도, 담금질 없인 새로 날 수 없다. 마오쩌둥이 장제스와의 대결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이 대장정 때의 담금질 덕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사람은 40㎞를 걸으면 물집이 생기고, 100㎞를 걸으면 물집이 터지고, 200㎞ 이상을 걸으면 피가 나오고, 발가락과 발이 고장 나고, 300㎞ 이상 걸으면 몸에 이상이 오는게 마련이다. 공산군은 1만 2000㎞ 이상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적과 싸우며 이동했다. 추위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자연의 험로를 돌파하였다.

이건은 마치 미국의 서부시대, 개척민들이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공산군이 옌안에 도착한 수는 불과 7000여 명, 처음 도망칠 때 8만 6000명의 불과 10분의 1 미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의 도망 길은 18개의 험준한 산맥을 넘고 24개의 큰 강을 건너 11개 성을 통과하면서, 지방 군벌과 싸우며 1년 이상 추위와 질병에 시달리며 1만 2000 여 ㎞를 돌파한 것이다.

대장정의 길은 험하고 멀었다. 길이 멀고 길수록 그들은 더 많은 농민을 만나고 접촉할 수 있었다. 약탈을 일삼던 장제스 군이나 지방 군벌들과는 달리 홍군은 농민을 보호하고 가능하면 도왔다. 대장정 중 공산군이 영향을 준 지역 농민의 수는 무려 2억 명에 달했다. 이때 공산군이 농민들의 환심을 산 것은 훗날 장제스 군을 격파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한다. 살아남은 7000명은 정예 중에도 가장 정예로운 공산당원이 되었다.

처음 시작은 패전에서 출발했지만 고난의 길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새로 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담금질이 장제스의 국민당 군을 끝내 굴복시켰고, 국가의 위기 때마다 국난을 극복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미국의 `명백한 운명`이 미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듯, 중국의 대장정은 두고두고 중국의 정신적 지표로서 국민을 분발케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국공내전- 국공내전이란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싸운 내전이다.

통상 1927년부터 1963년까지를 1차, 1936년부터 1949년까지를 2차 국공내전으로 구분한다. 국공내전은 1949년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수립을 선포하였을 때 사실상 종결되었다.

1925년 쑨원이 죽고 장제스가 집권한 후 30년 동안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벌이는 천하 쟁패는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장관이요, 일대 드라마다. 혹자는 유방과 항우의 대결에 비유하나 시공적으로 비교가 안 될 뿐더러 동원된 인물, 무력, 권모, 규모 등을 통틀어 초군급이다.

제군, 드라마를 시작해 볼까? 주의할 것은 내 얘기를 그냥 읽지 마라. 지배를 읽으란 말이다. 이것은 내가 쓴 글이다. 역사가의 서술도 글이다. 불교에 불립문자란 말이 있다. 글이란 한계가 있는 법, 모든 사실을 글로 옮길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사건은 서술과 다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풀어가는 사건을 눈으로만 읽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 역사를 읽을 때는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읽어야 한다. 지배를 보란 말이다. 실제 사건은 나의 글과는 다를 수 있다. 그래야 진짜 교훈, 감동, 영감을 얻을 수 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는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세력이 불어난 공산당을 완전히 청소하려는 장제스의 결단이었다. 체포된 공산당 지도자 리다자오를 포함하여 수많은 공산당원을 색출, 괴멸에 가까운 숙청을 단행하였다. 소위 `상하이 쿠데타`다. 1차 국공합작이 깨진 건 당연하다.

마오쩌둥은 독자적인 무력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난창봉기 후 중국 공농홍군을 조직하였다. 난창봉기란 1927년 8월 1일 장제스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중국 전역을 석권한 장제스는 이제 두려울 게 없어졌다. 교만해진 것이다. 공산당도 웬만큼 소탕했겠다, 국민당의 세력은 날로 커졌다. 집중된 권력, 강성해진 힘은 언제나 문제를 잉태한다. 오만해지고, 위아래로 독버섯이 자라기 시작한다. 바로 부정부패다. 장제스 국민당도 예외일 수 없다. 

처음엔 조그만 부정부패도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세월과 함께 자란다. 지도자가 정신을 차리고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커진다. 부패란 괴물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 조직, 나라를 망쳤다.

국민당이 부패하면서 비리와 수탈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민심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달랐다.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엄격한 기율을 선포, 홍군의 기강을 잡았다. 군기는 추상같았다.

민가의 닭 한 마리를 훔쳐도 사형에 처했다. 점령지역마다 지주들은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하였다. 농민들을 도울 수 있는 데 까지 크게 도왔다.

여기서 잠깐 두 사람의 지도자,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은 중국 천하를 차지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대만으로 쫓겨가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장제스는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사람이다. 마오쩌둥은 사상가요, 모략가다. 군인이 아니면서도 용병과 전술이 능한 전략가 였다.

장제스가 4차례에 걸쳐 토공전을 벌였지만 매번 실패한다. 장제스는 홍군보다 항상 5~10배의 병력과 좋은 장비를 갖고도 마우쩌둥을 격파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네 차례 장체스와 전투 중, 세 번은 직접 실병 지휘를 했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다.

장제스를 매번 이겼다는 것은 마오의 전술은 물론 지휫관으로서 자절도 뛰어났다는 증거다. 마오쩌둥의 전쟁 재능은 한국전쟁 때도 빛을 발했다. 인천상륙을 미리 경고하였고, 중공군 개입 후에는 펑더화이가 아니라 베이징의 마오쩌둥이 실병 지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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