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07:44 (수)
가야문화의 원형탐색과 가야불교
가야문화의 원형탐색과 가야불교
  • 도명스님
  • 승인 2022.10.17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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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br>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지난 15일 토요일 가야대학교 대강당에서 `제7회 가야문화 원형탐색과 콘텐츠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는 사단법인 가야문화진흥원과 동명대 인도문화연구소 그리고 사단법인 한국인도학회에서 주최하였고 김해시가 후원하였다.

학술대회에 앞서 통도사 승가대학 학장 인해스님의 사회로 홍태용 김해시장과 아시쉬 바버 인도불교 연구소장, 사띠스쿨 이사장 붓다팔라스님, 가야불교 연구소 소장 지원스님을 비롯한 가락국 시조대왕 숭선전 김재곤 사무국장과 김종철 가락김해시종친회 삼현파 회장이 함께 환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2000년 전 김수로왕과 인도공주 허황옥의 아름다운 인연을 통해 김해는 물론 한국과 인도의 우호를 더욱 깊이 할 것을 서로 약속하였다. 환담에서 홍 시장님은 인도에서도 고대 한국과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내면 허왕후 도래의 역사성과 함께 양국의 학술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 있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인도의 가야에 대한 관심은 인도대사가 우리나라에 새로 부임하면 가장 먼저 챙기는 공식 행사 중 하나가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참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일곱 번의 학술대회를 통해 그동안 신화로 치부해 버렸던 가야 초기 불교도래의 역사는 이제 가능성을 넘어 사실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 학술대회 기조강연에는 고조선과 단군 연구의 권위자인 민족문화연구원장 심백강 박사께서 가야의 `건국설화와 건국정신`이라는 주제로 매우 의미 있는 논제를 언급하였다. 심박사는 한학을 하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전통 교육을 통해 배운 한문 실력으로 원문 해석은 국내에서 손에 꼽는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정신문화원에서 한학연구원으로 있다가 우리 고대사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안정된 자리를 사직하고 역사학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강연에서 가락국기를 통해 수로왕 이전은 부족장인 구간사회가 지배하는 부족국가 시대지만 수로왕 이후는 왕이 지배하는 고대국가 시대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에 나와 있는 파사석탑의 역할에 대해 말한 "지금까지 복을 빌고 남쪽의 왜까지 진압하였으니 본국 본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紀)라는 부분을 들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처럼 가야도 야사(野史)가 아니라 정사(正史)의 기준이 되는 기전체로 씌워진 본기(本紀)가 스님 생전에도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기란 원래 왕의 사적을 기록하는데 파사석탑을 싣고 온 허왕후의 지아비 김수로는 가야의 시조 왕이기에 가야의 고대국가 성립은 서기 42년이 분명해진다. 

그는 또한 가야를 고조선의 후예로 보고 있는데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조>의 기사이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육부이다."라는 구절로 보면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으로 진한에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이 가야로 발전했다면 가야 역시 고조선의 유민임은 당연하다. 
또한 수로왕이 자신을 칭할 때 사용한 짐(朕)이란 단어가 있다. "짐은 태어나면서 자못 성스러웠다." 등에서 보이는 짐이란 호칭은 황제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허왕후  사후 제후의 죽음인 훙(薨)이 아니라 왕후의 죽음인 후붕(后崩)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을 들기도 했다. 또한 가락국기를 통해 본 가야의 정신에는 천명(天命), 질금(質儉), 혁신(革新), 무편무당(無偏無黨), 애민(愛民), 양보(讓步) 등의 여섯 가지가 엿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에서 해인사 승가대학 학감인 법장스님과 율학 승가대학원장 금강스님의 `가야불교의 보살계에 관한 고찰`과 `가야불교와 가야산`이란 주제발표가 있었다. 신선한 발표내용도 좋았지만 가야불교에 대한 학자 스님들의 참여가 매우 뜻깊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가야사 주류 사학계의 가야초기 불교전래의 부정적 시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가야불교를 지켜야 한다는 스님들과 자각과 연구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계종 종정 성파 예하께서도 "한국 최초의 불교가 가야불교임을 학술대회를 통해 밝혀달라"는 특별 당부도 있으셨던 것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아직도 우리 학계가 우리 역사를 지켜줄 것이란 순진한 생각은 접는 게 현명하리라 본다. 믿다가 마음에 상처 입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자기 집의 재산은 자기가 지키는 게 당연하듯 가야사를 비롯한 우리 역사도 국민이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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