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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 장현광의 사상적 본류
여헌 장현광의 사상적 본류
  • 이광수
  • 승인 2022.10.13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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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br>
이광수 소설가

강호동양학을 공부하다 보면 수천 년 전의 중국사와 이조 500년의 역사에서 명멸했던 빼어난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접하게 된다. 아득히 먼 시간이 흘렀지만 명현들이 기록으로 남긴 유저들을 섭렵하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시대의 학문은 서책의 내용을 통째로 암기해서 이해하는 학습 과정이라 수십 년의 세월을 학습에 쏟았다. 과거 응시자에겐 필수 통과의례지만 벼슬과는 담을 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한 재야학자들은 선현의 학설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때 후학으로서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었는데 바로 사법(師法)과 가법(家法)이었다. 물론 명ㆍ청 시대의 과거시험출제의 절대원칙인 팔고문(八股文, 성현을 대신해서 말함과 같이 틀에 박힌 엄격한 문체)은 예외로 친다. 사법은 제자는 스승의 학설에 어긋남이 없이 존숭함을 말하며, 가법은 유가, 도가, 법가 등 자신이 종지로 삼은 학파의 학풍을 벗어나지 않고 존숭함을 말한다. 이런 사법과 가법에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학설을 주장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경북 구미시 인동출신으로 본관이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학맥 상으로는 영남학파의 거두인 퇴계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鄭逑)의 직계문하로 그 아래에 김응조와 선우협을 두었다(조선유현연원도). 여헌은 정구의 질서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연스럽게 퇴계의 문인이 되었다. 정구 역시 여헌의 문재가 뛰어남을 알고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대유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사상적인 위치평가의 유력한 기준이 되는 학통과 이론의 양대 산맥은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이다. 당시 두 학통의 영향력이 비등하고 당색으로도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여헌은 이론적으로 퇴계를 계승했지만 율곡의 이론도 수용함으로써 사법과 가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어 정통수구파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황과 율곡은 한국유학 3대 논쟁사인 사단칠정논쟁, 호락논쟁, 예송논쟁 중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서 각자 대립되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황은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율곡은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사단칠정론에서 퇴계는 사단(四端: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칠정(七情: 喜, 怒, 哀, 懼, 愛, 惡, 欲)을 리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어 보았으며, 율곡은 사단칠정을 기발 일도설로 보았다. 여헌은 사단칠정을 모두 리발로 보았는데 그의 사단칠정 리발설은 율곡의 기발설과 비슷한 주장으로 볼 수 있으나 그 해석은 차이가 있다. 그는 칠정이외는 다른 정이 없으며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는 <성리설(性理說)>에서 `대개 정(情)은 이미 발동하고 이미 성취된 것을 지정하고 단(端)은 방금 발동하여 아직 성취하지 않은 것을 지칭한다.`고 했다. 이는 시간적인 선후일 뿐 발동형식이나 근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헌은 철학이론으로는 퇴계학파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퇴계설을 따르지 않았다. 특히 리와 기의 관계는 날실(經)과 씨실(緯)의 관계로 이해되는 리기론의 두드러진 특징인 경위설(經緯說)을 주장했다.

여헌 철학사상의 근원은 역학이었다. 평생을 역학에 전염해 <역학도설>과 <성리론>을 저술했다. 두 저서는 역학의 이론과 개념, 원리 및 역을 보는 관점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역학에 대해 성리설 위주의 일반 성리학자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모두 겪은 그는 피난길에도 주역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주저인 <역학도설>은 역학연구의 종합정리서로서 역학철학사에 등장한 선현학자들의 이론을 수집 정리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곁들이고 있다. 그러나 후기작인 <성리설>은 자신의 언어로 역에 대한 성찰을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여헌사상의 특징은 리기경위설 내지 도일체설로 대표되는 성리설이다. 이는 자신의 독자적 성리설의 체계수립으로 학문적으로는 한강 정구의 인연을 매개로 퇴계 이황과 연결되고, 영남학맥의 큰 줄기인 남명(南冥)조식(曺植)의 학풍과도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학문에 뜻을 세워 소과합격 후 대과응시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수차에 걸쳐 임금이 하사하는 벼슬자리를 극구 사양했으며 마지못해 현감 직에 잠시 머무는 정도에 그쳤다. 학문과 벼슬을 철저히 분리한 강직한 유학자였다.

그의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가 내려졌다. 경북 선산의 오산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입암서원, 성주의 천곡서원, 서산의 여헌영당, 의성의 빙산서원, 청송의 송학서원에 제향하였다. 경북 구미시에 `여헌연구회`가 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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