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36 (금)
지불의 고통
지불의 고통
  • 허성원
  • 승인 2022.10.11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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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br>대표 변리사<br>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골프 내기에서 돈을 잃는 건 매우 안 좋은 일이지만, 내기 없는 골프는 더 안 좋은 일이다.` 전 윔블던 챔피언 바비 릭스의 말이다. 적절한 내기는 골프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양념과 같다. 우리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홀마다 성적에 따라 1~4000원을 내는 착한 내기를 한다. 적은 돈이지만 모이면 캐디피 정도는 충당할 수 있고, 각자에게 돌아가는 부담도 비교적 고르다. 그런데 이 착한 푼돈 내기도 막상 해보면 더 큰 내기들에 비해 은근히 마음이 불편하여 체감 스트레스가 더 큰 듯하다.

어느 날 댄 애리얼리의 `부의 감각`이라는 책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지불의 고통`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비를 위해 돈을 지불할 때 현실의 물리적 통증과 유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돈을 지출할 때 MRI 등을 이용하여 뇌를 측정을 해보면, 벌에 쏘이거나 바늘에 찔렸을 때의 신체적인 고통을 처리하는 뇌의 영역이 자극된다고 한다. 지불의 고통은 일종의 `죄의식의 세금`과 같은 것으로서, 가진 돈을 포기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지출할 때 소비의 즐거움을 더 생각하면 지불의 고통은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구입한 것을 소비할 때 지출을 머리에 떠올리면 소비의 즐거움을 망칠 수 있다.

지불의 고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시간이다. 지출 시점과 소비 시점 간의 간극이 작을수록 고통은 크고 길수록 고통은 적다. 그래서 지불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불형의 고통이 가장 크고, 지불과 소비 두 행위가 시간적으로 이격된 선불형이나 후불형은 고통이 적다. 그 기간이 충분히 길어지면 지불의 기억이 흐려져 공짜를 즐기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야말로 시간이 명약이다.

선불형은 공연 티켓이나 패키지여행처럼 미리 예약과 결제를 완료해두는 방식이다. 온라인 서점과 같은 곳에서 미리 예치금을 입금해두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후불형은 먼저 소비를 한 다음 사후에 돈을 갚는 것이다. 곧 외상을 의미한다. 선불형과 후불형이 지불의 고통을 줄이는 데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절약이라는 관점에서는 고통이 큰 현불형 쪽이 가장 효과적이다. 특히 소비의 절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후불형이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과 같이, 돈을 갚아야 할 미래가 멀리 있을수록 지불의 고통은 급격히 줄어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당하고 있는 신용카드의 사악한 꼬드김이다.

우리 친구들의 착한 내기는 알고 보니 지불의 고통이 가장 큰 가혹한 게임인 셈이다. 매 홀마다 성적에 따라 부담금을 즉시 지불하는 현불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킨스 게임과 라스베가스 게임와 같이 오랜 전통을 가진 스테디셀러 게임들은 모두 선불형이다. 이들 게임은 미리 얼마씩 갹출하여 두고 매 홀에서 잘 친 쪽이 상금처럼 받아 간다. 지불할 때는 선불이니 고통이 적고, 매 홀마다 받게 되는 상금은 현불이기에 그 기쁨은 극대화된다. 사람의 심리를 잘 고려한 영리한 게임들이다. 오랜 인기를 유지하는 이유가 충분히 인정된다. 특정의 벌칙 이벤트를 개별로 누적해두었다가 라운딩이 종료될 때 정산하도록 하는 후불형 게임도 종종 이용된다. 이 역시 현불형에 비해서는 심적 부담이 적다.

이처럼 지불의 고통이 시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익의 기쁨도 시간에 좌우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시간의 종속변수인 듯하다. 지불과 같은 불편한 일, 예를 들어 분노, 갈등, 다툼 등은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대응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래야만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일단 줄이고, 나아가 그 고통이 주위로 확산되거나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 반면에, 돈 받을 일을 포함하여 사랑 고백, 칭찬, 격려 등과 같은 좋은 일은 그 귀한 정서가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신속히 대응하여야만 그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는 `언제`가 `어떻게`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니 `언제`가 `어떻게`를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와 삶을 온통 흔들어놓는 여러 좋고 나쁜 자극과 상황은 그들을 우리 뜻대로 일일이 고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반응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선택인 동시에 엄중한 책임으로서,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인생은 타이밍의 예술이며, 사람은 시간의 함수가 된다. 삶 속에서 만나는 온갖 좋음과 나쁨을 `언제` 취할 것인가. 현불인가, 선불 혹은 후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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