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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스님을 위한 변명
일연스님을 위한 변명
  • 도명스님
  • 승인 2022.10.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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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도명스님

고려말 국사였던 일연스님을 모르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연스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 사실 어떤 인물이나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온전히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스님은 생전에 왕의 스승인 국사로 추대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불교사를 통틀어도 불교발전에 끼친 영향은 손에 꼽을 정도로 지대하다. 하지만 그가 한국의 100대 위인속에 들어간 것은 종교적 업적이 아닌 <삼국유사>의 집필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몽골 원나라의 수차례 침입으로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로웠던 `원나라간섭기` 였다. 국토는 적에게 유린당해 피폐해졌고 국민의 삶은 도탄에 빠져 희망없는 어둠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눈에 비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의 물리적, 정신적 침탈로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와 문화가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금으로 강대국의 약소국 점령에 의한 문화침탈과 영향은 흔한 일이다. 우리가 겪었던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이 침탈한 티벳과 신장 위구르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예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혼란기에 지식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의 공포에 빠진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고뇌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은 역사였다. 그는 전문 역사가는 아니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전국을 다니면서 몸소 체험하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삼국유사를 남기기로 한다. 이렇게 남겨진 삼국유사는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는 한국학의 뿌리가 되며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의 고대사를 밝히는 중요한 사서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국조 단군을 비롯한 고조선의 역사와 함께 가야의 건국을 기록한 `가락국기`가 실려있다.

한편,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남겼다는 이러한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몇 곳에서는 부분적 결함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일제가 주장하는 반도사관의 근거로 활용되는 고조선의 강역부분에 대한 오류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며 그곳을 다스리게 한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데 일연 스님은 주석에서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하였다. 그러나 묘향산은 상고시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태백산이 되기 어렵다. 육당 최남선은 고대 하늘에 제천의식을 지냈던 곳인 백두산으로,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심백강 박사는 러시아 바이칼호 부근의 사얀산으로 비정한다. 다만 태백산에 대한 스님의 인식은 고려 당시 사람들의 고대 강역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조선의 수도에 대해서도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하면서 주석에 평양성의 위치를 `지금의 서경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때 서경은 현재의 북한 평양을 말한다. 그러나 스님의 위치 비정은 민족 사학계의 맹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처럼 <신당서,동이고려> 조에서도 "평양성을 장안성이라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다. 평양성의 남쪽은 패수(浿水)와 연해 있다."라는 것만 보아도 평양성의 위치는 대륙으로 봐야 한다.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도 "낙랑군은 옛날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在遼東)"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반도사관에 빠져 낙랑을 비롯한 한의 4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눈먼 이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터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실학자 박지원과 단재 신채호 그리고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 등은 평양성을 중국 요녕성 본계시(本溪市)라 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저자 자신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보공유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오래전의 역사를 완벽히 복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기록에 남겨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했던 그의 진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래야만 승려이기에 불교적으로 윤색했다는 일제 사학자들의 악의적인 주장과 함께 무지하여 우리의 역사를 축소했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삼국유사를 관통하는 전체적 틀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객관적 저술 원칙이 분명하지만 누구나 완벽할 순 없기에 부분적인 결함은 있을 수 있다. 물론 공과(功過)는 명확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고의인지 실수인지에 대한 의도는 감안되어야 한다. 부분적 결함이 전체적 결함으로 오해받아선 안 될 것이다, 나라를 걱정했던 일연스님의 큰 뜻을 헤아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두서없는 변론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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