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3:31 (수)
부활하는 고녕가야<古寧加耶>
부활하는 고녕가야<古寧加耶>
  • 도명스님
  • 승인 2022.09.26 2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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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br>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란 힘이 없으면 지켜내기 쉽지 않다. 역사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지난 2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정통성과 함께 나토가입 문제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전쟁 중 우크라이나의 박물관을 파괴하고 유물을 약탈해 갔는데, 이는 문화와 유물을 파괴함으로써 상대를 역사에서 완전히 지우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과거 일본도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했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의 고대사를 날조했다. 특히 가야를 약화시키고자 임나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가공의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고, 가야는 임나이며 자기네 옛 영토라고 억지를 부렸다. 또한 수로왕의 가야 건국은 믿을 수 없고 허왕후의 도래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고대사의 왜곡 중 가야사가 가장 심하게 왜곡된 것이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는데 이유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영향받은 국내 학자들의 식민사학 학풍 때문이다.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져 최근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나타났듯이, 합천의 다라 남원의 기문은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 7국 또는 임나의 소국이 맞다는 가야사 주류 사학계의 주장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가야에 대한 우리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인데 삼국유사에서는 구지봉에 수로왕과 함께 탄강한 육 형제가 여섯 가야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육 가야중 낙동강 상류 상주 문경을 토대로 건국한 고대국가가 고녕가야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 34 잡지 3편 지리지`에는 "고녕군은 본래 고녕 가야국으로 신라가 이를 취해 고동람군으로 삼았다. 한편 이르기를 고릉현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바꿨으며 지금은 함녕군이라 부른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권1 오가야조`에도 함녕 고녕가야에 대한 기록이 있다. "~ 먼저 아라가야는 현 함안이며, 둘째 고녕가야는 현 함녕이다. 셋째 대가야는 현 고령이며, 넷째 성산가야는 현 경산 혹은 벽진이다. 다섯째 소가야는 현 고성이다.~" 

함녕은 상주 일대와 문경의 옛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두 사서에 명확한 기록이 있고 현재까지 주변에 지명이 산재하며, 지금도 함창(함녕) 김씨 일족 다수가 고녕가야 시조 김고로(金古露)왕의 고분이 있는 상주는 물론 인접한 문경 일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제의 사학자 나카미치오는 고녕가야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해방 후 역사학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는 한발 더 나아가 상주의 고녕가야를 부정하며 그 위치를 경남 진주에 비정하였다. 이유는 상주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권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는데, 학문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했다. 또한 이병도 박사는 1962년 `수로왕고`에서 수로왕을 가야의 시조가 아닌 중시조라 하였다. 그는 1963년 `수로왕릉고`를 통해 현재 수로왕릉을 부정하며 김해 동상동 연화사 인근 가락궁허대(駕洛宮墟臺) 석축 기단을 수로왕릉이라고 비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병도 박사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에 가야사는 혼란스러워졌고 고녕가야는 역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후 문경 오봉산과 병풍산 주변의 이천 여기 이상 고분군이 사학계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벌건 대낮 도굴꾼들에게 무참히 도굴당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초순 문경문화예술회관에서 제2회 고녕가야 학술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학술대회를 개최한 고녕가야선양회 대표이신 문경 봉천사 주지 지정스님의 수년간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 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서암 큰스님의 제자로 선과 교를 두루 겸했다. 문경 지역 사찰에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지역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는데 너무나 왜곡된 역사를 보고서는 이를 바로 잡기로 뜻을 세우셨다 한다. 스님은 해박한 한문 실력으로 고서의 원문을 하나하나 풀어보았고 문제의 근원들도 속속 밝혀내었다.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스님이 직접 나선 것이다.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첨단에 가야사가 있다. 거기에 고녕가야의 복원과 가야 초기 불교 도래의 역사를 인정하는 두 가지 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다. 괜히 중국이나 일본 사서를 끌어와 가야사를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비판적 수용이란 근사한 말로 포장해 가야사의 뼈대까지 갈아 끼우려 해선 안 된다. 우리 사서를 있는 그대로 보면 가야사 복원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어렵지 않다. 악의적이고 교묘한 식민사학의 거품만 걷어내기만 하면 오히려 빛나는 육 가야가 본래 그 자리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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