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계절에 만나는 정치
역설의 계절에 만나는 정치
  • 류한열
  • 승인 2022.09.22 2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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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무책임한 말을
쉽게 용서하는 풍토 안돼
배신 능한 처세 몰아내야
류한열의 서향만리류한열 편집국장
류한열의 서향만리류한열 편집국장

우리 삶은 역설로 뒤범벅돼 있다. `패션은 혁명보다 더 많은 피해를 줬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혜안이니 만큼 곱씹어 봐도 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사회를 바꾼 혁명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면 패션을 뒤좇다 어떤 희생을 치렀을까? 많은 사람들은 최신 패션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스트레스를 받고 극단적인 대가를 치르는 일이 허다하다. 패션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삶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패션의 역설이다.

우리 정치판만큼 역설이 난무하는 곳도 없다. 정치인은 자기의 주장이나 이론을 스스로 거역하는 말과 행동으로 역설을 만들어낸다. 공천에서 배제돼 탈당한 후 다른 당으로 가면서 정치를 변혁할 기수로 자처하는 경우가 있고 개인적인 억울함으로 자기 당을 공격하는 행동은 꼴사납다. 배신이 상식이 되는 정치판이다.

역설로 꼬이는 사회에는 비겁한 사람이 힘을 쓴다. 상황이 바뀔 때 쉽게 자기 논리를 부정하고 쉽게 색깔을 바꾸면 살기는 편하다. 정치인은 발 바꾸기를 잘해야 험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공산이 크다. 그만큼 우리 정치판은 변수가 판을 친다. 여야가 벌리는 `역설 굿판`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하다. 오직 자기 당 중심으로 내뱉는 말에는 아무런 정의가 없다. 오직 자기 당 살리려고 상대 당을 처박는다. 어제 뱉은 말도 오늘 뒤집는 게 예사다. 역설이 춤을 추는 사회에서는 사회 정의를 말하는 것은 사치다. 사회를 지탱하는 뼈대를 받치는 정의는 상대 논리에 따라 불의가 된다. 정치의 도리를 배신하는 여야 정치인의 목소리가 갈수록 역겨워지고 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배신자는 지옥 구렁텅이에 빠지고 가장 참혹한 벌을 받는다. 9개 단계로 나눈 지옥은 아래로 갈수록 가혹한 벌이 진행된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을 4개 지역으로 나눴는데 그중 하나인 `카이나`에는 혈족을 배신한 자가 수용된다. 이곳에는 배신자가 득실거린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다. 겁을 주기 위한 인용이 아니라 문학사에 빛나는 신곡의 내용을 언급했을 뿐이다. 역설을 내세워 배신을 한 사람을 가장 깊은 구덩이로 보낸 단테가 1310년대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많은 나올 것을 예견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배신자를 가장 깊은 곳에 모실 생각을 했을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정치인의 무책임한 말을 쉽게 용서한다. 배신의 역설이 힘을 받는 사회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낼 수 없다. 배신자가 용서의 탈을 쓰고 다시 무대에 등장해 온갖 요술을 부리며 현혹한다 해도 흔들리면 안 된다. 그렇지만 흔들린다. 배신의 역설이 힘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서 배신의 역설이 통하는 걸 막아야 한다. 배신은 우리 정치를 받쳐주던 디딤돌을 걷어차는 몰염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정치가 희망을 쏘려면 배신의 역설과 이름은 더 이상 거명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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