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5:25 (금)
`조용한 사직`이라니?
`조용한 사직`이라니?
  • 허성원
  • 승인 2022.09.20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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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바람이 심상치 않다. MZ세대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중국과 미국을 거쳐 세계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사직이라 하지만 실제로 퇴사하는 건 아니고, 규정을 지키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일만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직장 문화이다. 업무 부담을 최소화하여 정신 건강과 삶의 질을 더 추구하며, 직장의 업무 방해를 목적으로 하는 태업이나 준법투쟁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소득이 줄게 될 것이니, 그에 맞추어 쓰고자 하는 소비문화도 함께 하게 된다. 중국어로는 반듯이 드러눕는다는 뜻의 탕핑(躺平)이라 한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노동력의 약 절반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직장인은 개인의 행복을 유보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혹은 미덕으로 여겼다. 치즈 조각을 보상받기 위해 무한히 달리는 쥐 경주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등장하였다. `조용한 사직`은 좀 과격한 워라밸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불편한 점이 느껴진다.

첫째는 일과 삶을 무리하게 나누려는 인식이다. 워라밸은 일과 삶을 각각 저울의 양 끝에 올려놓고 치우침이 없도록 하자는 말이다. 그 취지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일은 삶이 아니고 삶은 일이 아니며, 한쪽은 행복이고 다른 쪽은 고통이라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논리는 일과 삶을 서로 반대편에 서서 대척하는 가치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찌 삶에서 일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일이 삶의 의미나 행복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둘째는 열정의 문제다. 조용한 사직은 일에 대한 열정을 버리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열정 없는 직장인을 원하는 기업이 있는가. 그런 열정 없는 조직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경쟁력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기에 결국 조용한 사직은 개인이나 조직의 지속가능성에 치명적이며, 그래서 오래 지켜지기 어렵다. 셋째,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조용한 사직은 불성실에 가깝다. "지극히 성실하면서도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자는 아직 없었으며, 성실하지 않으면서 남을 감동시키는 자 역시 아직 없었다." 맹자의 말이다. 직장은 사람들을 널리 만나고 그 관계가 성숙되는 곳이다. 불성실한 자가 어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겠으며, 좋지 않은 인간관계로 어찌 행복을 보장 받겠는가.

넷째는 가장 중요한 `일의 의미`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주인공 슈호프는 벽돌을 쌓는 일을 맡는다. 모르타르가 혹한에 얼지 않도록 반죽 팀과 벽돌쌓기 팀은 손발을 맞춰 빠르게 작업해야 한다. 양 팀 사이에 은근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그렇게 혼신의 노력으로 일을 끝내고 나서도 슈호프는 일터를 그저 떠나지 못한다. "…쌓아 놓은 벽을 살펴보지 않고는 그냥 갈 수가 없는 성미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쑤욱 훑어본다. 그만하면 괜찮다. 이번에 벽을 따라서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휜 곳이 없나를 살핀다. 그의 눈 한쪽은 수준기나 진배없다. 반듯하다! 솜씨가 예전 그대로다."

그 절망의 환경에서 슈호프는 그토록 신명을 바쳐 일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경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의 의미`였다. 벽돌공인 슈호프에게 있어 벽돌쌓기는 정체성인 동시에 자존적 행위이다. 그 `의미`가 있었기에 그는 잠시나마 죄수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의 자유를 누렸다. 그래서 슈호프에게 있어 일은 곧 삶이요, 존재의 이유다.

이처럼 `일의 의미`는 자존적 인간만이 누리는 고귀한 가치다. 그것의 박탈은 큰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는 바위를 코린토스 산에 굴려 올리는 벌을 받는다. 다 올린 바위는 아래로 굴러떨어지니, 다시 굴려 올려야 한다. 그 의미 없는 일이 무한 반복되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런데 `조용한 사직`은 자신의 `일의 의미`를 스스로 버리거나 박탈하려 애쓰는 노릇이 아닌가. 일의 의미를 잃은 직장생활은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될 수 있다. 스스로의 자존을 자해적으로 파괴하면서 삶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니, 진정 불가해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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