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1:03 (금)
나라 밖을 내다보자 23
나라 밖을 내다보자 23
  • 박정기
  • 승인 2022.09.19 2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기 열정얘기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세계 4대 문명 황하 키운 중국1911년 신해혁명 후 `중화민국`인구 16억 못넘길 것, 제한적 면적서주시대 문화적 우월 의식 가져베이징조약 이후 화교 퍼져 중국은 크고, 사람 많고, 역사가 길고, 복잡하고, 말 많고, 뻥도 세고, 정말 알기 힘든 나라이다. "Americans count seconds and minutes. We Chinese, count decades and centuries(미국 사람은 분초를 따지지만, 우리는 10년 100년을 따진다)." 미 육군정훈학교의 중국계 미국인 교관이 수업 첫 시간에 던진 말이다. 중국 사람의 호흡이 길고 매사가 `만만디`요, 통이 큰 것은 모두 장구한 역사와 광대한 국토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 급한 게 없다. 오늘 안 되면 내일 한다. 여유만만하고 유유(悠悠)하다. `빨리빨리`의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도대체 얼마나 큰가. 국토는 960㎢, 남한의 약 100배, 미국이나 유럽 전체 넓이와 맞먹는다. 역사는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로부터 장장 5000년,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을 키운 나라다. 실은 `중국`이란 나라 이름은 아니다. 자기들이 사는 곳을 항상 세계중심으로 생각해 중국, 중화(中華)라 불렀다. 따라서 중국이란 국가 이름이라기보다 지역적 문화적인 개념으로 `우리는 너희 주변국의 어른`이라는 계서적(階序的) 국제질서를 위한 이름이다. 그러니까 하, 상, 주 이래 제국인 진나라, 한나라, 청나라까지도 중국을 국호로 쓰지 않았다. `중국`이 정식 국호로 채택된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성공 후, 쑨원이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나라 이름을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쓴 것이 처음이다. 그것을 줄여서 `중국`이 됐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나라인가? 무섭고, 고맙고, 유감 많고, 밉고, 선생님으로, 상전으로, 그것도 수백 년을 모셔온 나라다. 그러다가 100여 년 전에, 겨우 중국 손아귀에서 벗어난 게 우리다. 그때까지 중국 앞에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해본 게 우리 처지였다.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기에 이런 연에 묶여 살아왔을까? 참으로 기이하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모르다가 알 것도 같은-깊고 끈끈한 인연의 나라다. 1992년 9월 28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우리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의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리의 노태우 대통령과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이 대등한 입장에서 양국이 첫 수교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우리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중국보다는 잘사는 나라, 중국을 도와주는 처지에서 중국과 자리를 같이 한 축하연이었다.

30여 년 전만 해도, 그 당시 중국은 인구 11억, GDP가 겨우 4400억 달러, 1인당 소득은 불과 370달러. 한국의 GDP는 5000억 달러에 개인소득은 중국의 23배인 9000달러였다. 우리 꼰대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날 우린 몰래 눈물을 흘렸다. 조상 대대로 고개 한번 제대로 못 쳐들고 살았던 우리, 명나라 군사들에게 당했던 눈물겨운 설움, 삼전도의 굴욕, 가까이는 위안스카이의 폭거와 6ㆍ25 때 통일의 방해- 이루 셀 수 없는 설움의 세월, 그걸 어찌 우리가 잊으랴! 그날의 감동을 여러분은 모른다. 하기야 알 필요도 없다. 이 역사적 순간을 봐야 할 분들은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다. 여러분, 우리 젊은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뒤돌아보지 말라. 세상에 고약한 일이 과거에 발이 묶이는 거다. 1990년 북경 아시안 대회를 앞두고 친구 루다팽이 찾아왔다. 중국 육상연맹 부회장 겸 국제육상연맹(IAAF) 부회장, 영구서 교육받은 국제 신사. 내가 생전에 만난 두 사람의 현인(賢人)을 들라면 이 양반과 한국인으로는 지성한 선배다.

루 선생을 볼 때마다 나는 `삼국지`의 제갈량(諸葛亮)을 연상한다. 제갈량이 환생한다면 바로 루다팽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국제육상연맹 집행이사회의에서 발언을 하면 장내는 이상하리만큼 숙연(肅然)해진다. 그의 유려(流麗)한 영어와 비길 데 없이 정연한 논리는 우리 동료이사들 모두를 홀려 경청하게 만든다. 그만큼 그의 영어가 뛰어나고 논리가 정연하다. 결론은 항상 명쾌한 정답이다.

루 선생은 영국 런던의 `보딩 스쿨`에서 공부했으니까 베이징 정부에서 더 크게 안 써주는 것 같았다. 출신 성분이 안 좋은 부르주아로 취급하는 거다. 그의 방한 목적은 곧 있을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데 우리 육상연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나 보다. 체육 기자재(器資材)까지 얻으러 온 거다. 육상 기자재로는 허들, 높이뛰기, 장대높이뛰기 장비 등과 계측기기 등 약 35만달러 어치를 지원했다. 우리 꼰대 세대는 작은 것이지만 중국을 도울 때도 있었다.

젊은이들이여, 우리도 했는데 자네들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나. 절대 기죽을 것 없다. 겁날 것 없다. 나아가자! 나도 한다고.

중국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인구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92년 당시 인구는 약 11억 5000만 명, 당시 세계인구 약 54억의 약 21%. 현재는 15억 명으로 인도와 막상막하다. 속설에 의하면 중국의 전 국민이 4열종대로 천안문 앞을 행진하기 시작하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이 행진 대열은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행진을 계속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인구가 계속 태어나서 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10억이란 숫자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누구나 귀하다는 사람 목숨, 그 목숨이 10억이다. 한 사람이 1달러씩만 기부를 해도 당장에 10억 달러의 기부금이 모이는 게 아닌가. 그런데 중국과학원에 의하면 중국의 인구는 16억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국토는 넓은데 국토의 활용면적이 제한되고 물 부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악과 사막 지역을 뺀 가용 면적은 국토의 34%. 연간 강수량은 650mm. 16억 이상을 수용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중국 얘기에서 중화(中華)사상을 빼면 얘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중화사상이란 중국이 세계 중심이요, 자기들이 가장 문명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다. 사실이다. 황하문명이 가장 무르익었던 서주(西周)시대, 한족(漢族)은 주위의 이민족과 비교하면서 자기들의 문화적 우월 의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중(中)`이란 지리적,문화적 중심이며 `화(華)`란 뛰어난 문화를 가리킨다.

중화사상의 배후에는 다른 민족을 천시하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결국 중화사상은 이웃을 깔보는 화이사상과 같은 거다. 이(夷)는 오랑캐. 우리 조선족은 동이(東夷), 월남은 남만(南蠻), 위구르는 서융(西戎), 몽골은 북적(北狄)이라고 부르며 사람 차별을 했다. 그러니까 중화사상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자기들 외에는 처음부터 저급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 자기가 소중한 만큼 남도 존중되어야지, 그런 경우가 어디 있나. 자신감(自信感)만 있고 자존감(自尊感)은 없는 사람 아닌가. 자존(自尊)하면 타존(他尊)도 해야지.

중국 하면 화교(華僑)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860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해외 이주가 시작되었다. `바닷물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지 화교가 있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나갔다. 물론 동남아가 중심으로, 이들은 원래 근면한 사람들이라 거의 모두가 그 나라의 상권을 쥘 정도로 정착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동남아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국가에 공헌한 화교를 들라면 필리핀의 건국 아버지 호세 리살,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 왕년의 자유월남의 응오딘지엠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 싱가포르의 리관유(李光耀) 수상, 미얀마 네윈 수상 등, 쟁쟁한 인물들을 수없이 들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