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2:14 (금)
호국불교와 홍익인간
호국불교와 홍익인간
  • 도명스님
  • 승인 2022.09.12 1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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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 사 정 담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한국불교를 말할 때 흔히 통불교 또는 호국불교라고 한다. 통불교(通佛敎)는 대승, 소승, 정토, 밀교 등의 요소를 두루 갖춘 통합적인 불교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적인 불교의 특징 가운데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전통이 있다. 현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이신 성파 큰스님께서도 추대 기자회견에서 불교의 자비실천과 호국불교를 강조하셨다.

이는 통합적인 한국불교의 정체성속에 호국불교의 전통이 시대가 변해도 절집 안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뜻 보면 부처님의 자비 사상과 나라를 지킨다는 호국불교는 전혀 그 성격이 달라 보인다. 사실 호국불교는 전 세계 불교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한국불교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필자가 주위에서 자주 받았던 질문 중 하나는 "불교는 자비의 종교인데 임진왜란 당시 왜 스님들이 창칼을 들고 싸웠나요, 부처님은 살생을 금하라 하셨는데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 필자는 "불법의 입장에서는 적이라도 살생을 금하는 게 맞지만, 백성들이 잔악한 왜군에게 죽어 가는 것을 방관하는 것도 무자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승의 죄를 짓더라도 대승의 마음으로 승병을 일으켜 싸웠을 것입니다."라는 정도의 일반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러한 의문과 논쟁은 스님들 간에도 불살생이라는 본질적 입장과 중생구제라는 입장차가 있어 어느 것이 `정답이다`라고 결론짓기가 쉽지 않다. 다만 죄와 복이 상쇄되지 않는다는 냉엄한 인과의 측면에서 보면 `살생으로 지은 업은 업대로 남고, 방생으로 지은 복은 복대로 간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을 구하는 지혜와 이타행을 실천하는 자비가 근간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처럼 다른 불교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호국불교는 그 근원이 어디일까? 하고 평소 궁금해하였는데 최근 나름대로 그 답을 찾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불법의 힘을 통해 국난을 극복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전해오는데, 신라 시대의 고승 명랑법사가 밀교의 주문으로 신병(神兵)을 일으켜 왜군과 당나라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 아니라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청으로 금정산 아래 호법단(護法壇)을 치고 왕과 함께 7일 주야를 기도해 신병의 힘으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문무왕이 호법단을 차렸던 자리에 사찰을 세워줬는데 그 사찰이 오늘날의 금정산 범어사이다.

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전해진 호국불교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3ㆍ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던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이 있다. 또한 태허 스님과 백초월 스님 등은 모두 불가의 독립투사들이다. 이외에도 많은 스님들이 음양으로 나라 되찾기에 헌신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호국불교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니 그 뿌리가 이 땅에 최초로 성립된 가야불교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708년에 세워진 「김해명월사 사적비」를 보면 수로왕이 명월산에 세 절을 짓는데 "신국사는 세자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서쪽 벼랑에 있고, 진국사는 허왕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동쪽 골짜기에 있으며, 흥국사는 왕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산 가운데 있으니 곧 이 절로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국(新國)은 새 나라이고 진국(鎭國)은 안정된 나라이며, 흥국(興國)은 부흥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이처럼 수로왕은 사찰의 이름에 `나라 국(國)`을 넣어 신생국 가야의 부흥을 염원하는 한편, 나라를 지킨다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을 부여한 호국불교의 시원적 인물이다.

또한 그가 탈해와 대결했을 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함"이라고 천명하였는데, 이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유사해 보인다. 수로왕의 출신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기상과 정신을 보면 고조선을 이은 대륙의 후예로 보인다.

호국불교의 전통이 한국불교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고조선부터 지켜온 반만년 역사와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불법의 수호뿐 아니라 계급과 지역, 민족을 뛰어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을 보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숭고한 정신을 가졌더라도 나라가 사라지면 그 정신도 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홍익인간의 인본주의를 바탕에 둔 호국불교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절실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안에서도 홍익인간 정신을 진부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과 각박한 일상 속에서 옅어지고 무너지는 공동체에 대한 연대와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호국불교와 홍익인간은 굳건한 반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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