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22:15 (화)
다시 자연숭배로
다시 자연숭배로
  • 도명스님
  • 승인 2022.09.05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기후 위기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뉴스를 보면 지구촌 곳곳에서 거의 매일 수해와 가뭄, 산불 등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기후변화는 과거, 지구에서 여러 번 일어났으며 생태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 연구에서도 기후변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 존재했던 문명들의 흥망성쇠에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지금 인간은 우주 저 너머로 위성을 쏘아 보내고 컴퓨터와 고도의 기계들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도 기후변화로 인해 빈도가 잦아진 허리케인과 같은 돌발적인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 생존의 바탕이 되는 한편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알고 보면 인간 문화의 정수라고 하는 종교조차도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했다. 원시 미개인들은 벼락이나 홍수, 작열하는 태양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으면 자신들보다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생존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물, 불, 바람, 태양 등으로부터 이후 산, 바위, 나무들에게도 신성을 부여해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하였다. 이후 자연숭배의 토테미즘은 동물숭배의 애니미즘으로 옮겨갔다. 이윽고 조상과 영웅을 신격화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이후 창조주가 등장하는 고등종교로 발전한다. 이러한 종교 변천사를 살펴보면 모든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지 않으려는 심리가 결국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한 것이다.

종교의 이러한 발전 단계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연숭배라고 하면 원시인들의 미신 정도로 인식하기 십상이지만 대자연은 소자연인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프라타고라스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거대자연에 속한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적어도 자연은 인간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자연을 사전적 의미로 풀이하면 스스로 자(自)에 그러할 연(然) 자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은 어떤 대상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용되는 어떤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의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거대자연 즉, 우주란 `인연과 조건만 되면 물질이든 정신이든 그에 합당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이상기후`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건만 갖춰지면 메마른 사막에도 비가 내릴 수 있고, 동토의 시베리아 벌판에서도 꽃이 필 수도 있으며 모두가 정확한 인과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에 의해 기후가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고 작은 존재인지 알았고 그 앞에 겸허했다. 그리고 붓다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발견했다. 동양에서 인식한 우주는 조건에 의한 형성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과라는 물리적 법칙 안에서 생성과 변화 소멸되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변화를 의미하는 역(易)이란 단어로 정리했다.

반면 서양의 물질문명에 기반한 작금의 인류는 초고도 기술문명 단계에 이르렀지만 자연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지구는 여러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기체이며 인과의 법칙이 우선하는 곳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해 놓고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재해들을 `신의 벌`로 보아선 안 된다. 문제는 인간이 저질러 놓고 거룩한 존재에게 떠넘기는 발상 자체가 모순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 분명하니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해야 한다.

인류 멸망과 관련해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위기의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과 패권 다툼에 정신이 없다. 잇몸이 내려앉으면 이빨을 보전하기 어렵고 이웃에 강도가 들거나 불이 나면 내 집도 안전하지 않기 마련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매를 맞든지 호되게 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기라도 하지만 하나뿐인 지구는 대체 불가능하기에 더욱 근심으로 다가온다. 발달된 과학으로 지구를 대체할 곳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현실적으론 요원해 보인다.

지구에 있어서 벌과 모기가 해충인지 인간이 더 해로운 존재인지 돌아봐야 한다. 사실 미개의 척도가 과학의 발달과 문자의 인지 여부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위기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말로만 기후위기 대응을 외치는 소위 선진국들의 이중성이 더욱 미개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