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4:11 (금)
월탄 대종사의 원적에 곡하며
월탄 대종사의 원적에 곡하며
  • 김기원
  • 승인 2022.08.22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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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김기원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순교 정신으로 불교정화운동의 `선봉장`이였던 대종사의 원적에 애통하며 차 한 잔을 올립니다. 스님과 정축생 동갑으로 수행 기간에 희담을 나눴던 추억이 생각나 이 글로 답한다. 지난 1937년 9월 15일, 전북 완주에서 탄생했고, 속명은 유찬수, 법호는 `미룡(彌龍)`, 법명은 `월탄(月誕)`이다. 지난 4일 평소 안거하던 단양 대흥사 정화당에서, "풀어라 풀어라, 너와 나를 풀어라 본래 자리에 향기 나니, 미륵광명이 귀를 막네"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법랍 68년 세수 86세로 홀연히 원적의 세계에 드셨다.

전주에서 초중고교를 졸업 금오대선사를 만나 은사로 모시고, 1955년 9월 15일 화엄사에서 사미계, 1963년 7월 15일 해인사에 비구계를 받았다. 대한불교 종비생 1기로 작고한 전진주 연화사 주지였던 도안스님과 동기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서산대사의 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관직이 많았으나 동국대 승가총동문회장, 석림동문회 명예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스님은 쾌활하게 화통하며 직감적으로 공사를 구분하며 불의에는 못 참는 성격주의자로 매사에 적극적이다. 해인사 강원 사교과에서 수학하던 중, 일타스님이 계신 연대암에서 몇 차례 차를 나누면서 "중은 차를 진하게 먹어야 각을 얻습니다"라고 하자, 일타스님은 "하하하, 그런, 법담도 바람처럼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1960년 11월 19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강원 대표로 참석했고, 이승만 대통령 정권 당시 대처비구 재판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1960년 11월 24일, 정부 측 대법원은 대처 측편에 손을 들어주어 판결에 항의하고, 한국불교 정화운동 정법수호에 목숨을 던지는데 선두주자로 대법원장 집무실에 들어가서 할복을 시도했던 비구스님이 당시 국민들로부터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이해와 호응을 이끌어 냈다.

스님의 순교적 혈기와 정화 정신에 감동받은 청담대종사을 비롯한 정화운동 지도부는 종단행정에 참여토록 독려한 이후 서울 개운사 주지, 총무원 규정부장, 총무부장, 조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사장, 강화도 전등사 주지, 속리산 법주사 주지 등과 4, 5, 6, 8, 10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과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했다. 또한 2010년에 조계종 원로의원의장 2017년 조계종 법계위원장에 추대되셨고, 국민훈장 동백장(5201호)을 수상하였다.

흘러가는 여러 법연 가운데 필자가 기억되는 두 개의 큰 사건이다. 첫째는 이미 논한 바같이1960년 정담대종사의 불교정화운동때의 인연이다. 둘째는 2003년경으로 기억되며 스님이 속리산 법주사 총책으로 계실 때로 생각된다. 법주 사내에 연화문의 큰 향로를 이고 대담하게 서 있는 당당한 화견보살의 모습이 쉽게 발견되며 법주사를 출입하는 국민에 청렴의 용기를 주었다. 당시 한국의 차 운동이 무질서하게 진행될 무럽 이모 차연구가 화견보살이 이고 있는 큰 향로를 큰 다완을 이고 있다고 주장했고 법주사가다. 차계는 이와 비슷한 논쟁이 허다하나 바르게 갈 길은 멀고도 멀어 보인다.

인류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我)`라는 집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했다. 천지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다. 내가 있으므로 우주가 있고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만물은 여아동체(同體)다. 나와 너는 한몸이다. 지구와 나는 한 몸인 것이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은 없지만 내가 없어야 이 세상이 모두 내가 된다. 사바세계와 이별을 고했지만, 대종사의 가르침과 수행 정신은 길이 남아 한국불교와 인류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등불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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