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5:17 (금)
단군은 역사의 인물인가
단군은 역사의 인물인가
  • 이헌동
  • 승인 2022.08.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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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단군이라고 하면 단군신화가 먼저 생각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단군이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 신화 속의 인물로만 인식되도록 한 식민사관에 의한 식민사학 유풍의 교육으로 인한 것이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는 단군을 실존 인물 즉 단군사화(檀君史話)로 교육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역사교과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동국사략>은 1906년 편찬된 대한제국의 역사교과서이고 <대한역사>는 1907년 편찬된 대한제국의 역사교과서다.

<동국사략 권1 태고사 단군조선>

△단군(檀君)이 비로소 나라를 세우다

단군의 이름은 왕검(王儉)이니 우리 동방에 처음으로 국가를 세운 왕이다. 할아버지는 환인(桓因)이며, 아버지 환웅(桓雄)이 태백산(太白山, 영변 묘향산) 박달나무 밑에서 왕을 낳았는데 임금으로서의 덕(德)을 지니고 있어 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으니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239년 [광무(光武) 10년(1906)으로부터 헤아려 내려오면 이와 같다.]이다.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다

국호를 제정하여 조선이라 한 것은 국경이 동방(東方)에 소재하여 아침 해가 뜨면 만물이 선명(鮮明)해짐을 의미한 것이다. 평양에 도읍을 세우고 비서갑(非西岬)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동쪽으로는 큰 바다, 서쪽으로는 중국 성경성(盛京省)과 황해와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조령(鳥嶺), 북쪽은 지나(支那) 흑룡강성(黑龍江省)을 접하였다.

인민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묶어 머리를 덮게 하였으며, 강화 마니산에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왕자 3인에게 명령하여 성을 쌓았으니 이곳이 삼랑성(三郞城)이었다.

△구월산(九月山)으로 천도(遷都)하다

황해도 구월산에 천도하고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지나(支那) 하우씨(夏禹氏)의 도산회(塗山會)에 보내어 각국과 옥백(玉帛)을 예물로 교환하며 만나보았다.

그 후 자손이 1000여 년 동안 왕위를 전해 오다가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건너 온 이후에는 왕위를 내놓고 부여(扶餘)로 천도하니 단군 능(檀君陵)이 현재 평안남도 강동군에 있다.

<대한역사>

△제1절 단군이 탄생하다

환인(桓因)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아들 환웅(桓雄)을 낳고, 환웅이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영변 묘향산) 박달나무(檀木) 아래에 집을 짓고 왕검(王儉)을 낳았다.

△제2절 단군이 나라를 세우다

왕검이 성스러운 덕(聖德)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가 단군이 되었다. 나라 이름을 가장 먼저 아침 해를 받아 빛난다는 까닭에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원년(元年)은 요(堯)임금 25년이고, 융희(隆熙) 원년(1907)으로부터 4240년 전이다. 비로소 백성을 교화하여 머리를 묶어 덮었으며 왕과 신하, 남녀의 음식과 거처의 제도를 처음 갖추었다.

△제3절 단군이 도읍을 정하다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 우씨(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석하도록 하고, 왕자 3명을 강화 전등산으로 보내 삼랑성(三郞城)을 쌓았다.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이후에 백악(白岳)[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겼다. 팽오(彭吳)에게 명령하여 국내 산천에 제사를 올릴 때에 동쪽은 대해(大海, 지금의 태평양)로 하고, 서쪽은 요하(遼河)[지금의 지나(支那) 성경성(盛京省)]에 이르렀고, 남쪽은 조령(鳥嶺, 지금의 문경군)에 이르고, 북쪽은 흑룡강(黑龍江)[지금의 지나(支那) 흑룡강성 북측]에 닿았다.

△제4절 기자(箕子)에게 양위(讓位)하다

단군의 후손이 왕위를 서로 이어간 지 1212년에 왕위를 기자에게 양위하고 북부여로 옮겼다가 이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부여는 지금의 지나(支那) 길림(吉林)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존화사상에 의거한 인식이 있어도 단군은 실존 인물로 역사서술을 하고 있다.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만 다룬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한 것으로, 이것이 해방 후 식민사학 유풍의 교육으로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세종은 평양에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신 정전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 단군사화로 단군을 인식하였음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나라의 생일인 개천절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식민사학 유풍에 의한 역사관 때문이다. 언제쯤 세종과 같은 주인정신의 역사관으로 단군사화로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개천절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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