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6:34 (금)
행복의 조건
행복의 조건
  • 도명스님
  • 승인 2022.08.01 2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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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br>(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
(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 간다. 흔히 운명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흐름을 불가에서는 업(業)이라 한다. 업은 자기가 과거에 지어온 반복적인 습관들로,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다시 발현하여 자기가 받게 된다. 물론 선업(善業) 악업(惡業) 상관없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냉엄함이 존재한다. 운명을 말하는 세상의 많은 학설 가운데 업론(業論)만큼 모든 생명의 다양성과 귀천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이론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귀천은 자기 팔자소관이라 하지만 엄밀히 보면 각자가 얼마만큼 선업과 악업을 지었는가에 따라 그 고하가 나누어진다. 모든 이가 자신은 과거에 좋은 업을 많이 지어 지금 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과 현실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삶은 우리가 원하는 생각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며, 복은 어떤 절대적 대상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복은 스스로가 짓는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또 다른 요소로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

최근에 회자되는 말 중의 하나가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다` 또는 `내면의 상태이다`라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심은 결과로 주어진 현재의 상황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온전히 자기의 몫이기 때문이다. 조건이 부족해 보여도 시각의 전환에 의해 행복에 도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는데 이와 관련한 하나의 은유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돌쇠라는 마음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돌쇠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나무를 하여 장에 내다 팔거나 남의 집 일을 봐주며 고단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검은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가 나타났고 돌쇠는 놀랄 틈도 없이 옥황상제 앞에 불려 갔다. 졸지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목숨이 옮겨 간 것이다. 상제가 묻기를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돌쇠입니다. 사는 곳은 어디인가 무릉동입니다. 나이는 몇인가, 스물다섯입니다." 순간 치부책을 들여다보던 상제가 의아한 눈빛으로 돌쇠를 보았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저승사자에게 "여기 치부책의 돌쇠는 여든 살인데 저 이는 스물다섯이라 하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물으니 사자는 무척 당황했다. 그때 돌쇠는 "상제님 우리 마을에 저와 이름이 같은 나이 많은 어르신이 살고 계십니다" 하였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 저승사자가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황당한 실수를 하였던 것이다.

아랫사람의 실수라도 옥황상제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돌쇠에게 "이제 너를 다시 이승에 보내 주겠다. 네가 한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노라" 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돌쇠는 "상제님 저의 소원은 소박합니다. 제가 가난해 장가도 못 갔습니다. 수수한 얼굴의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만나 경치 좋고 물 좋은 깊은 골짜기에서 두꺼비 같은 아들과 토끼 같은 딸 낳아서 오손도손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하였다. 돌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옥황상제는 "야 이놈아! 그런 복은 나도 갖추지 못했다. 그 복이 보통 복인 줄 아는가" 하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돌쇠가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소원을 말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옥황상제는 자신도 그런 복이 없다는 말에 놀랐다. 사람들은 모두 옥황상제의 높은 위치와 권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상제 자신은 매일 사람들을 취조하고 벌을 줘야 하는 업무에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세인들은 가족을 이루고 일상을 평범하게 사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높은 권위의 옥황상제조차도 얻지 못하는 행복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유처럼 행복이란 상대적이며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조건 속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태도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하여 주어진 조건에 대한 감사함은 긍정적 마음을 이끌어 내고 복을 재생산하는 요인이 된다. 불만은 궁핍한 마음으로부터 오고 만족은 감사한 마음에서 온다. 또 궁핍한 마음은 불만스러운 상황을 불러오고 여유롭고 감사한 마음은 만족스러운 상황을 불러온다.

행복은 `다행 幸`에 `복 福`자를 쓴다. 다행한 복이 행복의 사전적 의미이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처럼 행복은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크게 겪을 일을 작게 겪으면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것도 작은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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